[헤럴드경제=김윤희 기자]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낮 12시5분.
A국장이 막 밥 한술을 뜨려 하는데 핸드폰에 ‘02-784-’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찍혔다. 국회에서 걸려온 전화다. 국회의원은 다짜고짜 왜 자료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다그친다. 당장 한 시간 내로 현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도 했다. 허공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던 A국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해당 국회의원이 자료를 요구한 적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국회의원의 전형적인 군기잡기”라고 억울해하면서도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을을 위한 국회’, ‘갑을 상생’을 외치는 국회의원은 실상 대한민국의 ‘슈퍼 갑’이다. 국정감사와 대정부질문 등을 통한 행정부 견제 기능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법률 제ㆍ개정권으로 갖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특히 공무원은 대표적인 ‘을(乙)’이다.
행정부 2인자로 불리는 정홍원 국무총리도 국회에 들어서면 ‘모양’이 구겨진다. 지난 13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는 꾹꾹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가, “총리답지 않게 왜이리 역정을 내냐”는 호통을 듣고는 멀쓱해졌다.
국정감사 기간이 시작되면 공무원들은 문턱이 닳도록 국회를 드나든다. 국회의원이 요구한 자료를 제출하고, 지적한 문제에 상세히 해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당부처의 실국장급 인사들이 상임위 회의실 뒷자리에 ‘병풍’처럼 둘러앉은 것도 국정감사, 대정부질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각 기업체도 국회에 ‘줄’을 대기 위해 전방위로 뛴다. 이른바 국회를 상대로 하는 ‘대관(對官) 업무’다. 각 기업 대관 담당자들은 국회의원은 커녕, 실무 보좌관을 잠깐 만나기 위해서도 부탁을 거듭해야 한다.
최근 ‘갑의 횡포’의 주역으로 낙인 찍힌 모 대기업 상무는 B의원실 비서관을 만나기 위해 국회 내 인맥을 총동원했다. “잠깐 뵙고 설명만 드리겠다”며 면담시간을 얻어냈지만, 결국 면박만 듣고 쫓겨났다. 해당 보좌관은 “이렇게 허술한 자료로 누굴 설득하겠다는 것이냐”며 회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들을 쏟아냈다.
철옹성 같은 국회 내 ‘벽’을 실감한 기업들은 너도나도 여의도 출신을 영입해 대관업무 담당자로 확충하고 있다. 국회 사정에 빤한 전문인력을 충원한다는 측면 외에도, 국회의원과 기존 보좌관 인맥을 총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한 대관업무 담당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의 집안 대소사만 잘 알아도 업무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공무원과 기업체에는 ‘갑’으로 군림하는 국회 보좌관들은 정작 국회의원들 앞에서는 ‘을’로 전락한다.
밤샘야근과 지역출장, 주말출근이 비일비재해도 국회의원들에게 이의 한번 제기할 수 없다. 국회의원 한마디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파리목숨’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노동절에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실 앞에 붙은 ‘노동절을 준수합니다’라는 문구가 전체 의원실에 회자된 것도 이같은 열악한 근무조건을 반영한다. C보좌관은 “우리 의원은 노동절 행사를 앞두고 온갖 잡무를 지시했다”고 투덜댔다.
스스로 사표를 제출한 한 보좌관은 “그동안 의원의 횡포를 낱낱이 고발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다른 의원실에도 취직할 수 없을 것 같아 꾹 참았다”고 말했다. 반면 또다른 전직 보좌관은 당 게시판에 해당 국회의원의 무지를 지적하는 글을 게시한 후 훌훌 여의도 정치판을 떠났다.
그나마 국회 보좌관들은 ‘인턴’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다. 국회 내 또다른 비정규직인 국회 인턴의 한달 기본급은 120만원. 여기에 각종 시간외 수당을 붙였다가 다시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120만원 초반대에 이른다. 일반 대기업 인턴보다 많은 액수지만, 실제 근무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 국회 인턴은 “면접에서 의원이 ‘저녁회식을 수시로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곧 ‘수시로 야근을 해야한다’는 의미인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국회 입법활동을 돕고 공공기관 경력을 쌓고싶어 지원서를 냈지만, 맡겨진 일은 잡무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의정활동을 카메라로 찍고,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 등이다. 서류업무도 기계적인 통계와 정리에 국한될 뿐이다. 한 보좌관은 “나름 꿈을 안고 들어온 국회인턴이 의원들 저녁 술자리까지 동행하는 것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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