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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어떻게 놀아야 할 것인가
[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시간 보내기’는 현대인의 큰 화두이자, 숙제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일생의 3분의 1 정도를 자신이 직접 선택해서 뭔가를 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이를 여가 또는 ‘프리타임’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3분의 1은 잠ㆍ식사ㆍ씻기 등 생리적인 시간이며, 나머지 3분의 1은 일하는 시간이다.

생리적 시간은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보내는 시간, 즉 여가는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여가는 점점 길어진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수명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일하는 것은 학습했지만, 노는 것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거의 없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의 성과주의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해 ‘피로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해당 인사를 통한 취재와 독서,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좀 더 잘 노는 방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관계지향적 사회는 피곤하다=우리 사회에서 사는 게 서양보다 조금 더 피곤한 것은 ‘관계’와 ‘소통’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소통이 강박 수준이다. 소통이 잘 안 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힐링’이 판을 친다. 우리는 목적에 충실한 삶, 기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서양인보다 더 피곤할 수밖에 없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에는 비행기가 한 섬에 추락하자 탑승객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 사회학에서 구조기능주의가 발달한 이유가 이해된다. 우리 같으면 서로 나이, 고향, 다녔던 학교 등을 물으며 관계와 위계부터 파악했을 것이다. 관계지향적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목적지향적 사회보다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가고 싶지 않은 수많은 모임과 경조사, 행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는 살기 어렵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절충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노는 사람의 최고봉은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구분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노는 것 같은데 일하고 있고, 일하는 것 같은데 재밌게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접목과 조화가 잘 이뤄져야 한다. 모든 직장인의 딜레마는 조직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의 괴리에 있다. 직장이 요구하는 일을 소홀히 하다가는 조직에서 버틸 수 없다. 그러니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일단 하고 그 일을 확장시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도 만들면, 어느 순간 그 하기 싫은 일이 재미있어진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고 재밌는 ‘꺼리’들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 영역에서 그런 시도는 가능하다.


▶‘생존의 공간’과 함께 ‘실존의 공간’도 만들어라=이런 작업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존(生存)’의 공간 외에 ‘실존(實存)’의 공간을 만들면 좋다. 이는 시인 김갑수에게 들은 내용이다. 직장은 생존의 공간이며, 학생들에게는 학교가 생존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생존의 공간에는 당연히 ‘나’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직장은 나를 위해 굴러가는 곳이 아니라, 조직이 추구하는 공동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직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생존’이 객관을 중시한다면 ‘실존’은 주관을 다루는 곳이다. 생존의 공간에서는 노는 것에도 ‘나’를 돌아보는 행위는 빠져 있다. ‘회식’에서 술 빨리 먹고, 2차로 노래방에 가 목을 찢어야 한다. 이런 ‘자학(自虐)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존의 공간에서는 자아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자기 실존과 만날 수 있다. 실존의 공간은 극장이든, 여행지나 펜션이든, 잔디밭이나 산책지든, 인터넷 관심 동호회든 상관이 없다. 자신이 여유를 찾고 즐길 수 있으면 된다. 실존의 공간은 ‘판타지 공간’이다. 각박한 현실을 떠나 환상과 꿈을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재미가 나온다. 김갑수 시인은 서울 마포에 ‘자기 판타지 공간’인 음악실을 마련해놓고 직장과 관계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수시로 불러 대화하고 감성을 나눈다.

실존의 공간이 없는 사람은 퇴직하면 막막해진다. 그럴 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실존의 공간이 있다면 좀 더 생활이 윤택해진다. 나를 돌아보는 행위, 사색과 성찰이 가능한 이곳에서 의미 있는 것, 재미있는 것들이 만들어진다.

▶재미있게 살려면 관점을 자주 바꿔야=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은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재미가 무엇인지 정의하라고 하면 막연해진다.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재미를 관점 전환기술로 정의한다. 관점이 자주 전환될 때 재미가 극대화된다고 한다. 관점 전환이 자주 되는 싸움과 전쟁이 구경거리로는 재미있는 이유다.

김 소장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재미(fun)’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으며, 그 본질은 구경거리 또는 관점이라고 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노천카페와 철도여행이 늘어났으며 영화가 발명된 것도 모두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노천카페는 커피 한잔 마시며 밖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즐기는 곳이다. 요즘도 프랑스 파리의 노천카페는 야외 좌석이 실내석보다 더 비싸다.

철도여행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상이 알아서 움직여주는 재미의 도구다. 영화는 시공간의 관점 전환을 파노라마처럼 해줄 수 있다. 원래 몽타주 이론은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관점 전환기술로 고안됐다고 한다.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수많은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을 여러 카메라로 교차시킴으로써 긴장감을 높인다. 그래서 생기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바로 재미다. 이런 짜릿한 기분은 어지럼과 현란함을 동반하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와 유사하다. 재미가 구체화된 것이다. 재미의 본질이 관점 전환임을 안다면 매번 무교동, 한곳에서 모임을 가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홍대 앞, 이대 앞, 신촌 등으로 ‘그림(관점)’을 바꿔줘야 재미도 올라간다.

이와 함께 김 소장은 재밌게 살려면 자신만의 일상 의식, 즉 리추얼(Ritual)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붉은악마의 응원,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집단적ㆍ국가적 리추얼 말고 개인적인 리추얼을 늘려야 한다. 노천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셔보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도 좋다. 이효리가 하는 유기견 보호와 같은 거창한 일이 아닌 사소한 의식도 좋다. 칸트가 매일 일정 시간 산책을 한 것도 개인 리추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재미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은 재미있었을 것이다. 이론을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사색하며 사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기억과 여유와 의미가 담겨 있는 개인 리추얼은 그 행위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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