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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붕괴직전의 구 소련에 유행했던 만평 가운데 사막에 파묻혀 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목까지 모래가 차올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을 정도의 급박한 상황에 물주전자를 든 남자가 다가온다. 이 남자가 “물을 드릴까요?”라고 묻자 모래 속에 묻힌 남자는 손을 내밀며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돈돈돈!을 외치던 사회 분위기를 풍자한 것이다.

1985년 4월 기치를 올린 소련의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 페레스트로이카는 스탈린주의의 고질적인 병폐 타파를 외쳤지만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소비재의 만성적 부족과 관료들의 부패로 대중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힘겨웠다. 1990년 마침내 구소련이 붕괴되고 옐친이 정권을 잡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관료와 경찰, KGB 출신의 마피아까지 가세해 거리에서 돈을 뜯기는 게 다반사였다. 당시 은행은 일정 자본금만 갖추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그때 러시아 등록 은행 수는 2000개를 넘었다. 소련 붕괴 직전 나와 세계적인 히트를 친 영화가 표트르 토도로프스키 감독의 ‘인터걸’이다. 간호원이란 멀쩡한 직업을 가진 여성이 밤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매춘을 하는 이야기는 소련에 무지했던 외부 세계에 충격을 줬다. 국내에선 ‘소련이 옷을 벗는다’는 카피로 유명해졌지만 소련판 매춘 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토도로프스키 감독은 이방인으로서 타냐의 소외감을 통해 조국과 어머니 러시아를 새롭게 조명한다. 두 번의 모라토리엄을 겪고 자원을 바탕으로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뤄낸 요즘 러시아에는 사회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 무한경쟁과 빈익빈 부익부, 소외감 등이 러시아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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