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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논현동 182번지 ‘나가요 언니들’ 상대 맞춤형 상권…24시간 미용실·네일숍 등 한밤에 더 활기띠는 그들만의 ‘불야성’
밤8시 미용실 북적·주변엔 콜뛰기車 긴 행렬
늦은 밤일 피로회복제 불티…애견숍도 인기

불경기에 유흥업소 단속 영향 새벽엔 한산
“우리가 남들과 다른건 달보고 출근한다는것”



서울 강남구 논현동 182번지. 신논현역과 논현역 사이에 위치한 이 거리는 골목골목 자리잡은 술집과 간판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번쩍이는 불빛과 취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느 강남 유흥가와 다를 바 없지만, 안쪽으로 쭉 뻗은 길로 들어가다 보면 보통 술집거리와는 다른 풍경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논현동 ‘미용실 거리’.

이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H 포장마차(포차)에서 삼성동 방향으로 쭉 뻗은 길에는 술집이 아닌 가게들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영업을 한다. 미용실, 네일숍, 옷가게 등 여성들이 주로 가는 업종의 가게들이 수십개씩 위치하고, 중간중간 약국과 애견숍도 불을 켠 채 손님을 기다린다.

이들의 고객들은 다름 아닌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접대부, 소위 ‘나가요 언니’들이다.

182번지의 가게들은 ‘언니’들이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맞춤형 상권인 것. 헤럴드경제는 이 거리의 밤을 취재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182번지는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맞춤형 상권이다. 24시 영업을 알리는 미용실 간판이 불을 밝힌 새벽거리를 여성 2명이 지나가고 있다.

▶오후 8시에 깨어나는 거리=지난 2일 오후 8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거리는 활기찼다. 마치 오전 8시 강남역의 출근풍경처럼 거리는 ‘출근’을 준비하는 업소여성들로 북적였다. 여성들은 고급외제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갔고, 미용실 주변에는 여성들을 기다리는 외제차들의 긴 행렬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A 미용실. 세련된 인테리어도 아닌 평범한 동네미용실로 보이는 이곳에는 한껏 꾸민 업소여성들이 출근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미용실 직원 김모(28) 씨는 “오늘만 이미 70~80명의 ‘언니’들이 다녀갔다”며 하루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182번지에는 이런 미용실이 40여군데에 달한다. 24시간 운영하는 이곳 미용실의 손님들은 대부분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다. 일반가게들이 오전 9시께부터 손님을 받고 오후 8시에는 문을 닫는 것에 비해 182번지의 미용실들의 ‘피크타임’은 오후 6시부터다. 적어도 오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출근하는 언니들의 출근 전 메이크업과 드라이 주문이 밀려오기 때문. 일반 미용실이 커트나 염색 등 다양한 미용을 하는 것에 비해 182번지 미용실들의 주력은 ‘드라이’다. 집에서 바로 나와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고, 드라이와 간단한 세팅만 하고 바로 출근하는 언니들이 대부분이다.

미용실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다름 아닌 1.5ℓ 페트병에 담긴 아이스커피다. 김 씨는 “손님들이 대부분 밤에 일하기 때문에 카페인 기운으로 버틸 힘을 찾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 보통 페트병으로 3병은 준비한다”고 말했다.
 

▶콜뛰기 외제차와 남성 접대부=메이크업을 마친 한 여성은 휴대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5분 뒤면 끝나. A 미용실 앞으로 와.”

잠시 후 여성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외제차에 올랐다. 외제차의 정체는 이른바 ‘콜뛰기 차량(돈을 받고 인근 업소들을 왔다 갔다 하는 불법 사설택시)’.

미용실 거리에는 이런 여성들을 기다리는 외제차들이 2m 간격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여성들은 서로 “오늘도 잘해! 조심하고”라는 말로 하루가 아무 탈 없이 지나가길 바라며 차에 올랐다.

잠시 손님이 뜸한 듯하던 미용실거리에 다시 활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여성이 아닌 남성 손님들이었다. 바로 인근 호스트바 등에서 일하는 남성 접대부들이었다.

미용실 직원 장모(25) 씨는 “여성 접대부들이 오후 6시에서 9시 사이에 출근준비를 마치면 이후에는 ‘호스트바 선수’들이 출근준비를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밤은 깊어가고 어느새 시계 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주변 상가는 불이 꺼질 기미가 안보였다.

약국 앞에는 언니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피로회복제 상자 15개 정도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아가씨들의 잔심부름하는 아저씨들이 소화제나 피로회복제를 사러 들락거렸다.

거리에 위치한 한 애견숍 관계자는 “밤사이 일을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애견을 밤에 이곳에 맡기고, 퇴근하는 아침에 다시 찾으러 오는 경우가 많아 24시간 영업을 한다”고 말했다.

 
논현동 182번지 거리의 가게들은 대부분 24시간 영업한다. 밤에 일하는 인근 업소 여성들을 위한 맞춤상권인셈. 미용실은 물론, 편의점, 옷가게 등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새벽까지 성업 중이다. 여성의류와 신발 등을 파는 가게 조명에 비친 옷이 밝게 빛나고 있다.

▶불경기는 예외가 없었다=밤새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한산해진 거리엔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미용실 거리 중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48) 씨는 그 거리의 외로움은 ‘떠나간 업소 종사자들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작년부터 계속된 극심한 유흥업소 단속을 못 참고 여성 접대부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다는 것.

김 씨는 “예전엔 생리대 같은 여성용품을 이틀에 한 번씩 비치시켰죠. 지금은 며칠을 둬도 진열대에서 사라지지도 않아요. 매출은 한 20% 줄었을라나? 날보고 ‘삼촌 삼촌’하던 여자애들은 이제 부천 등 경기도 쪽으로 다 갔고…”라며 낮은 목소리로 과거를 추억했다.

실제 새벽시간이 된 미용실은 한산했다. 손님은 겨우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한 미용실 직원은 “예전에 경기가 좋았을 때는 출근 후에도 몇 번이나 머리나 메이크업을 하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여성들로 밤새 북적였다”며 “이제는 그런 손님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새벽 4시. 물청소 차량이 출근시간을 준비했다. 동시에 영업을 마친 업소 여성들은 인근 술집에서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거나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가게정리를 하던 미용실 직원 정모(26ㆍ여) 씨는 언제부터 일했냐는 질문에 “1년 정도 됐다”며 “일하는 것은 다른 동네의 미용실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린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출근하고 일반 사람들은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출근하는 것 아니겠냐”며 “우리에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달이 뜨는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서상범ㆍ석지현 기자/tig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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