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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단종① 영월 청령포ㆍ관풍헌--550년 전 단종 그 ‘슬픈인연’ 속으로
[헤럴드경제= 영월] 병약한 아버지 문종(文宗)은 왕위에서 2년을 보내고 12살인 어린 아들 홍위(弘暐)의 앞날 걱정 속 1452년 5월 18일 승하했다.

1441년 7월 23일 할아버지 세종 23년에 태어난 홍위는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이다.

승하 직전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남지(南智), 좌의정 김종서(金宗瑞)에게 아들의 보위를 신신당부하는 고명을 남겼다. 수양ㆍ안평 등 동생들의 야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할아버지 세종도 장손인 단종의 안위가 걱정돼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을 몰래 불러 앞날을 당부했었다. 아들 문종과 함께 늘 병마에 시달린 세종은 자신과 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그 역시 둘째아들 수양의 거침없는 성격을 걱정했었다.

단종이 유배온 영월 청령포

단종 즉위 1년(1453년) 삼촌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형 문종이 유탁한 김종서 집을 습격, 그와 아들을 죽이고 조정대신들을 단종 명으로 궁궐로 소집, 일거에 제거했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보낸 후 사사했다. 정인지ㆍ권람ㆍ한명회ㆍ양정 등이 주축이 돼 수양대군의 거사를 돕는 핵심 역할을 했다.

이제 어린 단종은 ‘궁궐 속 섬’에 혼자 갇혔다. ‘등 뒤’엔 서슬퍼런 삼촌 수양대군이 눈을 휘둥거리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다. 그리고 2년 후 1455년 6월 11일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는 모양새로 빼앗아 갔다. 15살 단종이 삼촌 세조의 상왕이 됐다. 말이 상왕이지 감시 속 사실상 감옥생활이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면서 1457년 단종은 상왕 신분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된다. 성삼문 등 신하 6명은 화를 입고 죽음을 맞았고 ‘사육신(死六臣)’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걸출의 대왕 세종도 생전에 걱정했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결국은 ‘일’을 낸 것이다.

6월22일 창덕궁을 떠난 어린 단종은 남한강을 거슬러 7일만에 청령포에 도착했다. ‘궁궐 속 섬’에서 나와 ‘육지 속 섬’에 갇혔다.

4월 어느 주말, 17살 단종의 애사가 스며있는 청령포로 발길을 향했다. 충절의 고장 강원도 영월이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까마는 오늘도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가야 했다. 단종이 겪었을 그 암담했던 나날들을 상상해보면서.

태어난지 3일만에 어머니(현덕왕후 권씨)를 여의고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젖을 먹고 자랐다. 12살에 아버지 문종까지 병사하자 졸지에 고아가 된 단종. 17살에 숙부에게 쫓겨나 유배온 땅이다.

550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데에는 단 1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청령포를 휘감아도는 서강, 통통배를 타고 1분이면 556년 전 단종이 첫 발을 내디뎠던 그 자갈 섞인 모래사장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면 소나무숲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 막히고 나머지 한쪽은 육육봉(六六峯)의 험한 절벽산이다.

1분 걸리는 배에서 내리면 모래사장이고 그 앞 소나무숲 속에 단종이 머물던 어소가 있다.

천연감옥으로의 유배, 지금은 숲 좋고 공기 좋고 경치 좋아 찾지만, 어린 나이에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나 이곳에 갇힌 단종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알만했다.

함께 투어한 엄기평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계장과 김원식 선생님은 “이곳은 어소(御所)가 있던 곳이니 큰소리 내지 말아야 하고, 신발을 끌지 말아야 하며, 공수(拱手)의 예를 갖추어야 하느니라” 라며 필자에게 농을 건네 파안대소를 자아냈다. 영월 주민들은 그만큼 이곳을 신성시하고 싶어했다.

이 날의 강물은 유난히 푸르렀다.소나무숲으로 막 들어서면 어소 옆에서 시녀들이 거처했던 초가가 나온다. 당시 왕을 모시던 시녀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아 눈길을 끌었다.

담 하나 사이로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다. 넓은 뜰 가운데에는 여기가 어소 터임을 알리는 유지비각(단묘재본부시유지ㆍ端廟在本府時遺址)이 있다. 영조 39년(1763년) 왕의 친필로 세웠다. 이 비각 주위 마당에 집터 크기로 빙 둘러 네모나게 돌을 박아놓았는데 원래 어소가 있던 자리의 표시라고 한다. 지금 어소는 소실된 후 뒤쪽으로 살짝 옮겨 지었다.

단종이 머물던 어소.
어소 마당 비각과 함께 원래 집터였던 자리를 표시해둔 표지석이 마당에 네모로 박혀있다.

복원된 어소는 유배온 왕의 거처가 이러했음을 상상해서 지은 집이다. 옛날 양반들의 집 규모에 불과하다. 어소에는 단종의 모습도 재현해 놓았다.

어소 밖으로 나오면 수많은 소나무숲 가운데 유난히 큰 고목의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관음송(觀音松ㆍ높이 30m, 둘레 5m)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봤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해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단종은 이 나무가 두 줄기로 갈라지는 부분에 걸터앉기도 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는데 단종이 이곳에 왔을 때 60년생으로 추산됐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모든 소나무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죽고 새 나무가 자라는데 유독 이 관음송만은 죽지않고 ‘단종애사’를 전해주고 있다. 마치 단종의 슬픔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 죽을 수 없는 기세다. 다른 소나무는 많아야 200~300년생이고 이제 갓 자라는 소나무도 있었다. 이 모두가 관음송의 자손이다.

단종의 애환을 고스란히 보고 들어온 소나무 관음송. 600살이다.

이곳에서 높은 언덕으로 오르면 왼쪽 산비탈에는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돌을 주워 쌓은 망향탑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한양의 궁궐을 그리워한 절벽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노산군의 이름을 따 노산대라고 부른다. 발 밑은 높은 절벽으로 푸른 서강이 흐른다. 이 강물은 흘러흘러 한양으로 간다. 단종도 이 물줄기에 ‘눈물젖은 마음의 편지’를 담아 그리운 왕비에게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단종이 자주 올라 한양을 그리워했다는 노산대 바위. 한양쪽을 바라본 모습.

데크를 따라 내려오면 또 하나의 비석이 나온다. 금표비(禁標碑)다. ‘淸泠浦禁標(청령포금표)’라고 쓴 비석으로 ‘어소가 있는 곳으로 누구든 접근을 금한다’는 뜻인데 영월부사 윤양래가 영조의 윤허를 받아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접근을 막는 범위가 적혀있는데 동서로 300척, 남북 490척으로 돼 있다.(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1척(尺)이 30cm이니 300척이라 해봐야 고작 90m 밖에 안되는 곳을 금한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멋진 첨언이 있다. ‘此後泥生亦在當禁(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해서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기는 모든 땅에도 금한다’로 쓰여있다. 결국 이곳 모든 땅이 어소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와서 농사를 짓거나 산림을 채취하는 행위를 금했다.

청령포의 이모저모. 금표비와 왕방연 시비(위 왼쪽부터). 아래는 청령포를 산책하는 사람들.

김 선생님은 ‘청령포(淸泠浦)’는 ‘임금으로부터 배움을 얻고 깨달음을 얻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애환이 서린 청령포, 하지만 단종은 이곳에서 두달만에 떠나야 했다. 홍수로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이어(移御)하게 된다.

관풍헌은 조선초기 객사로 세 채가 나란히 붙어있는 건물이다. 앞쪽에는 매죽루(梅竹樓)라는 정자가 있는데 단종이 머물면서 자규루(子規樓)라 부르게 됐다. 단종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정자에 올라 두견새를 벗삼아 시를 읊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종이 여기서 지은 시가 자규시(子規詩)다. 이 관풍헌이 지금은 종교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주변에는 큰 모텔이 들어서 있어 ‘단종의 향기’를 망가뜨리는 모양새가 돼 안타까웠다.

관풍헌에서 두달째 머무는 사이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유배지 경상도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돼 사사되고 그 바람에 단종도 노산군 신분에서 서인으로 내려지면서 결국 최후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영월읍내에 있는 관아 객사였던 관풍헌. 단종은 청령포 유배 두달 후 이곳으로 옮겨 두달 머물다 생을 마감했다. 작은 사진은 단종이 자주 올랐던 자규루.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ㆍ오후 5~7시)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관풍헌으로 갖고 온 사약과 공생 복득의 교살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약을 갖고 온 왕방연은 차마 단종 앞으로 들고 가지 못했다. 수행원이 시간이 없어 독촉하자 하는 수 없이 임금 앞에 엎드리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 까닭을 묻는데 역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단종을 곁에서 모시던 공생이 ‘일’을 자처했다.

“命賜 魯山君 死 (명사 노산군 사)
 
단종은 승하했다.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는 얘기와 함께 목졸려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방연이 돌아오는 길에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이때의 슬픈 심정을 노래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 울어 밤길 예 놋다”
…………………………
■ 懷端宗而作詩調 (회단종이작시조) - 왕방연 (王邦衍)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천리원원도 미인이별추)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차심무소착 하마임천류)

川流亦如我 嗚咽去不休 (천류적여아 오인거불휴)


■ 사육신 & 생육신

△ 사육신(死六臣) : 생육신과 함께 조선시대 충절의 아이콘이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로부터 죽임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을 말한다. 단종 복위를 위해 세조를 축출하려 했던 사건, 즉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무려 70여명이 연루돼 죽었는데 그 중 이 6명에 대해 사육신이라 부른다.

△ 생육신(生六臣) :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발해 살아있으면서 절개를 지킨 6신하 남효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를 말한다. 이들은 벼슬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살며 단종을 추모했다.


■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一自怨禽 出帝宮 (일자원금 출제궁) / 孤身雙影 碧山中 (고신쌍영 벽산중)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오니 /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暇眠夜夜 眠無假 (가면야야 면무가) / 窮限年年 恨不窮 (궁한년년 한불궁)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 殘月白 (성단효잠 잔월백) / 血淚春谷 落花紅 (혈류춘곡 낙화홍)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 피를 뿌린 듯한 봄의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天聾尙未 聞哀訴 (천롱상미 문애소) / 何奈愁人 耳獨聰 (하내수인 이독청)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자 못하는지 /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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