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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직 철강업체 사장의 특별한 경영닥터 인생…김성덕 위원장 “움켜쥔 손을 펴면 바로 행복의 문(門)으로”
[헤럴드경제=김영상ㆍ박수진 기자]독자들에게 퀴즈 하나를 내드리겠다. 다소 넌센스 퀴즈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굴까. 여러가지 있겠지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여러개일수 있지만 ‘나누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눌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 ‘행복한 사람’이 하나 있다. 그냥 행복한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해 죽겠다고 말하는 이다. 김성덕(68) 전경련중소기업경영자문단(이하 경영자문단) 위원장이다. 경영자문단은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 내 기구로, 열악한 환경의 중소기업을 위해 애로점을 진단하고 처방해주는 경영멘토 16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로 대기업에서 내로라했던 최고경영자(CEO), 임원 출신들로 꾸며져 있다. 자신이 갈고 닦은 대기업에서의 경영 노하우를 퇴직 후 중소기업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는 이들로, 경영지식 나눔이라는 ‘제2 멘토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이같은 160여명의 멘토들을 지휘하는 이가 김 위원장이다. 누구보다도 좀 더 특별한, 좀 더 정제된 나눔철학을 갖고 있어 보이는 이유다.

김 위원장도 한때는 경영현장 절정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한국감정원 직원으로 출발해 연합철강 사장을 거쳤고, 한국철강신문 부사장도 역임했다. 인생의 ‘단맛’은 충분히 맛봤다.

그런 그는 은퇴 후 멘토인생을 살고 있다. 왜 그럴까.

김 위원장은 “뭔가를 움켜쥔 손을 활짝 펴면(나누면) 행복이 있다”고 했다. “나눔인생은 정말 가치가 있고, 보람있는 삶”이라고도 했다. 그는 “돈이 아무리 많고, 권세가 있더라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그것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이라며 “나누는 길에 들어서면 바로 그게 행복의 입문(入門)”이라고 했다.
 
비가 걷히고 사방이 꽃이 피는 계절에 만난 김성덕 위원장의 표정은 밝았다. 70 가까운 나이에도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동안 비결이 뭐냐고하니 “나누다보면 늙을 새가 없는 것 같다”며 약간 쑥스러워했다. 김 위원장은 은퇴 직전 부인과 함께 한 1년간의 세계여행을 통해 나눔의 미학을 깨달았다고 했다. “움켜쥔 손을 활짝 펴니 행복이 보였다”고 했다. 만개(滿開)한 꽃에 만개한 나눔. 그의 제2 멘토 인생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경영자문단에 대한 긍지심도 엿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식이라는 것은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것인데, 경영자문단 모든 사람들이 지식봉사하는 것을 돈으로 따지면 아마 수 조원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지식 나눔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경영지식 나눔의 길에 접어들었고, 지금까지 왜 무보수의 궂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나눔 정신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다=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약간의 대물림은 피할 수 없다. 성격도 그렇듯이, 나눔도 그렇다. 부모가 나누는 인생을 살았다면 자식도 나눔의 길에 동참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나눔에도 유전자는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194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영흥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원산 인근이다)

3살때 어머니 등에 업혀 서울로 내려왔다. 6ㆍ25 전이었지만 북한에서도 물자 징수 등 전쟁 조짐이 있자 부모님은 ‘더이상 못살 곳이다’고 판단해 서울로 내려왔단다.

영흥에서 3살까지 살았으니 그곳에서의 기억은 남아있을리 없다. 영흥에서 부모님이 유난히 정에 약해 남에게 무조건 나눠줬다는 얘기는 커가면서 주변에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다.

휴먼다큐 전경련중소기업협력센터 김성덕 위원장.                                                       안훈기자 rosedale@heraldcorp.com

“아버지는 이북에서 제재소를 했다고 해요. 먹고 살만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헐벗은 사람을 그냥 보지 못했다고 해요. 신발도 없어 맨발로 다니는사람이 많았다는데, 게다(일본식 나무신)를 만들어 나눠줬다고 해요. 학교에다가 기부도 많이 하기도 했고요.”

모친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집에 나물을 팔러오는 사람이 오면 반갑게 맞이했고, 절반정도 팔았으면 아예 나머지를 사줬다고 하더군요.”

그가 뒤늦게 경영나눔의 길에 들어선 것은 어찌보면 사람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부모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이를 인정한다. “막연하지만 부모님이 손 크게 남에게 나눠줬다는 얘기를 듣고 컸는데, 아마 이게 훗날 멘토인생을 살라는 암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제를 잠시 ‘얼굴’로 돌려보자. 70 가까운 김 위원장의 얼굴은 화색이 돈다. 아무리 많이 쳐도 60정도로 보인다. 동안이다. 피부가 좋다고 하자 “욕심을 버리고 나누면 얼굴도 좋아지는 것”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의 부인은 기가 막히도록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한다. 그가 밝은 얼굴로 집에 돌아가면 “오늘 자문하고 왔어요?”라고 묻는단다. 중소기업에 가서 경영지식을 나눠주고, 뿌듯함을 지니고 귀가하면 얼굴엔 자연스럽게 흐뭇한 미소가 흐르는 모양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우리 신랑 잘했다’고 격려해주는 부인의 멘트에서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단다.

그의 지식 나눔 인생에는 이렇듯 부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가 많이 있다. 그 스토리를 알려면 시간을 건너 뛰어야 한다.

“현직에서 은퇴하기 바로 직전인 2004년,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정도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아내는 당시 중앙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여행 가자’고 했더니 금방 사표를 내더군요. 둘이서 미국, 유럽, 동남아 등지를 1년간 돌아다녔어요.”

여행은 인간의 사고의 폭을 확연히 넓혀주는 법이다. 여행은 그래서 의미가있는 것이다. 그 역시 그랬다.


▶세계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은 갈때는 빈손이라는 것=사실 부부동반의 1년간 해외여행은 인생 전반기를 정리하는 일종의 승부수였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고, 재충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래도 장기 해외여행이라 과학적인 스케줄이 필요했다. 남들은 해외에 나갔다가 한국에 돌아오고, 다시 나가는 여행이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자동차로 해외로만 떠돌고 싶었다. 항공 패키지로 그때그때의 항공편은 예약해 놨지만, 옷이며 캠핑도구며 자잘한 식품 등을 미리 해외로 보냈다. 미국에선 샌디에이고를, 유럽에선 독일을 베이스캠프로 삼을 계획이었으므로 현지에 다 배송했다.

“짐을 샌디에이고 지인(知人)의 집에 맡기고, 자동차에 필요한 것만 싣고 무작정 돌아다녔어요. 가다가 힘들면 쉬고, 잠자고, 또 가고….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1년을 낭인처럼 떠돌았다. 귀국 후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여러가지 짐을 보내놨는데, 자동차로 돌아다니니까 굳이 들춰보지 않은 짐도 많더라는생각. 아, 한가지 깨달음이 생겼단다. “짐이란 가벼울수록 좋은 것이구나. 아무리 많은 짐(물건)이 있다고 해도 결국 다 쓰지 못하는 게 인생인데,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구나.”

돈과 재산, 명예에 너무 몰입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오니 ‘우리가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벼울수록 좋더군요. 돌아와서 집사람하고 이렇게 얘길 했어요. 손을 활짝 펴고 살자고. 어차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쓰고 살지도 못할바엔 나누고, 손을 펴는 인생을 살자고요.”

부창부수(夫倡婦隨)였을까. 아내 역시 크게 공감했다. 지금도 경영자문을 한다고 하루종일 밖으로 나돌아 다녀도 불평 한마디 없는 것은 이때의 깨달음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고 김 위원장은 말한다. 다소 자랑끼가 묻어나게.

해외여행시 많은 사람들이 지식 봉사를 하는 것도 목격했다. 한국엔 왜 이런 것이 없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타이밍은 맞았다.

그때 마침 전경련에 경영자문단이 생겼다. 2005년 자문단에 참여했다. 너무 좋았다. 진작 이렇게 살 걸 하는 후회가 생길 정도로.

“봉사(지식나눔)를 해보니 정말 보람이 컸어요. 내가 좀 알고 있는 것을 남한테 주는데, 그것에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늘을 날아 갈 것 같더군요.”

김 위원장이 아는 사람 모임 중에는 ‘다쓰죽’이라고 있단다. 금전이나 명예도 결국은 다 필요없고 ‘다 쓰고 죽자’라는 의미의 모임이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의 길을 걷게 됐다.

“자문위원에게 늘 말합니다. ‘이제까지 배운 것, 가진 것, 다 쓰고 갑시다’라고. 저 역시 중소기업에 가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려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죠. 아낌없이 주면, 진정한 행복이 돌아오니까요.”


▶한때 파일럿을 꿈꿨지만…=그의 학창생활이 궁금했다. 답은 시원치 않다.

“제가 누님이 셋, 여동생이 둘 있어요. 중간에 끼어 있는데…. 순둥이 아니었겠어요? 학창시절 내내 소심했습니다. 얌전하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죠.”

공군사관학교를 가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성격이 바뀌었다.

“원래 공대 전자과를 가려고 했는데 떨어졌어요. 1년 재수할 생각도 있었죠. 친구들이 ‘특채 시험 한번 보자’고 했어요. 해사, 공사 둘다 붙었죠. 결과적으로 친구들은 다 떨어졌고요. 친구 녀석 중 하나가 ‘시험 잘못 본 것 같다’며 마산, 부산으로 놀러가자고 하더군요. 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서울역에 용돈 주러 나오셨어요. 아버지는 저보다 키가 더 커 180센티미터 쯤 됐는데, 제 윗주머니에 담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는 ‘이놈, 이게 뭐야’ 하시더니 두말도 않고 그냥 가시더군요. (사실 그는 고1때부터 담배를 가끔 피웠다고 고백했다) 그때 대학은 떨어지고, 사관학교는 붙어 있고…. 아버지는 나중에 혹시 제가 잘못될까봐 절 끌고 사관학교에 가서 입학을 시켰습니다.”

공군사관학교에서의 ‘파일럿’에 대한 꿈은 그렇게 진행됐다. “처음부터 파일럿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비행기는 한번 타봐야겠다는 쪽으로 꿈이 생기더군요. 생활도 성격도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운동선수로 발탁됐다. 럭비선수로 뽑혔는데, 악바리처럼 대들었다. 포지션은 스크럼 프론트. 1학년때 경기를 하다가 상대방과 충돌하면서 허리에 금이 갔다. 아프다고 하소연해도, 의무대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답답할 일이지만, 4년내내 허리가 아픈채 지냈다. 그나마 젊음이 있었기에 가끔의 통증을 참아냈고. 응원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임관하고 나서 비행기훈련을 하는데 허리가 계속 아팠다. 결국 공신력 있는병원에서 정밀 조사를 했고, 허리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알게 됐고, 11시간 동안 수술을 했다. 파일럿의 꿈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퇴원을 해서도 몸을 추스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배운 것 없이 몸만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살까 싶었습니다.”

컴퓨터는 그때 배웠다. 생산성본부, 한국감정원을 거쳐 연합철강에 입사했다. 컴퓨터보다는 영업과 기획, 경영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때다. 무역을 하던 젊은시절의 아버지를 따라 하고 싶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연합철강에선 수출 쪽에서 일하게 됐다. “수출 쪽에 가서 보니 물건을 일일이 저울로 재고, 그걸 기차로 서울로 보내서 그걸 받아 파운드 등으로 환산을 해서 선적서를 만들고, 이렇게 은행에 내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리더군요. 퍼뜩 아이디어가 생각 났어요. 그렇게 하지 말고 부산에서 생산이 되는대로 텔렉스로 보내면 그걸 서울에서 받아서 컴퓨터에 입력, 선적서류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죠. 일주일 걸리던 게 하루로 줄었어요. 당시 금리가 20%정도였는데 5000만달러 수출에 1주일 이자면 상당히 경영에 도움이 됐습니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죠.”

상사나 주변 동료에 ‘힘든 일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맡겨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게 성공의 지름길이었나 보다. “인가 서류 받아오라고 시키면 담당자(부처 공무원) 옆에 가서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매달리니까 하루만에 일을 해결한 적도 많습니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승진이 빨라지게 됐다. 수출을 주로 하다보니 미국 쪽 지사에도 두번 나갔다. 결국 공채로 들어온 사람 중 김 위원장이 가장 먼저 대표이사가 됐다.

그가 성공한 배경은 노력이다. “휴스턴지점에 나갔을 때 오일쇼크가 있었는데요. 철강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휴스턴이 가라앉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운전하면서 노트 필기를 못하니까 녹음기를 사서 다니면서 철강이라는 간판 붙은 회사들을 다 보면서 상황 정리 녹음을 했습니다. 일본, 한국, 미국 경제 신문을 보면서 수요 공급 관계를 다 파악했습니다. 이게 쌓이니 중요 데이터가 되더군요. 철강 시장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죠.”

▶영락없는 팔불출, 자식자랑=지난 2002년 영화배우 한석규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이중간첩’을 만든 김현정 감독이 바로 그의 큰 아들이다. 아들 얘기로 돌아가자 영락없는 부모 표정이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김 감독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김 위원장이 미국 지점에 근무했을때다. 어느날 학교에서 부모 상담을 하더란다. “갔더니 글쎄 선생님이 아들 녀석 적성과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얘기는 안하고, 산수를 잘한다는 말만 하는 거예요.”

처음엔 의아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그게 미국식 교육이라는 것을.

믿고 키웠다.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었다.

“현정이가 영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학생 자신이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적어 내라고 하더군요. 우린 일치했어요. 영화감독이라고. 나중에 얘길 들으니 전교생 중 학생과 부모의 희망 직업이 일치한 것은 우리 부자(父子) 뿐이었다고 하더군요.”

귀한(?) 아들을 자유롭고 믿고 창의적으로 키웠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인생의 여유가 있다는 뜻일게다. 더이상의 무리한 욕심은 없다는 방증.

인터뷰 마무리로 돌아가자 그는 경영닥터제에 관해 다시 한마디 한다.

“대부분 중소기업 사장을 만나면 자금문제, 노조문제, 대기업과의 관계 등으로 얼굴 한쪽은 근심 걱정이 가득합니다. 툭 터놓고 의논할 사람이 없으니 외로운 것이죠. 저도 겪어봐서 이해가 됩니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의논 상대가 돼주면 그렇게 고마워하고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제 인생 후반부는 그런 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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