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소설가 박범신 40번째 ‘소금’..“가족은 빨대였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소설가 박범신의 데뷔 40년, 40번째 소설 ‘소금’(한겨레출판사)은 그가 표명한 ‘자본주의 폭력성’을 드러낸 3부작, ‘비즈니스’(2010년)와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2011년)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자본주의 구조가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돌아볼 때 ‘소금’은 기존의 소설과 선을 달리한다. ‘외압’에 맞서 가족이 똘똘 뭉치거나 용서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는 기존의 코드 대신, 작가는 아버지의 가출, 가족 해체로 나아간다.

대기업 상무 선명우는 그런대로 현실에 적응하면서 아버지ㆍ남편 노릇을 하며 돈 버는 기계 역할을 충실히 해온 남자다.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딸들, 소비욕망이 끝이 없는 아내를 위해 헌신하며 숙맥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더 주지 못하는 아버지 노릇에 허둥대고, 그들이 화를 내면 모두 제 잘못으로 여긴다. 셋째딸 시우의 생일, 눈 내리는 언덕 위 빌라를 올라오다가 그는 딸의 생일선물을 찾아오지 않은 걸 깨닫고 바삐 다시 내려간다. 얼마 전 췌장암 정밀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의사의 말 이후 그는 더욱 깜빡깜빡한다. 그 모습이 우연하게도 창밖을 바라보던 시우의 눈에 들어온다. 시우는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다.

“어깻죽지를 오그린 것이 비탈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뭐랄까, 아버지는 등짐을 잔뜩 짊어진 것 같았다. 멀고 먼 풍진 세상을 걸어온 듯 힘들고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그녀는 느꼈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본문 중)

언덕길을 내려오던 명우는 길에 멈춰 선 작은 소금 트럭을 발견한다. 그때 하얀 결정의 소금이 그의 눈을 찌르며 벼락처럼 오랫동안 잊은, 죽은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운다. 소금 트럭의 장애 가족을 의도치 않게 돌보게 된 그는 진짜 가족의 생각에서 멀어진다. 가족들은 그에게서 ‘아버지란 원래 그런 존재인양’ 쉼없이 단물을 취하는 빨대였다. 평생 뜨거운 염전에서 대파를 밀다가 염전에 코 박고 죽은 아버지에게 그 역시 빨대였다.

‘소금’은 베이비붐 세대 아버지들의 자화상이다. 꿈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굴욕과 치사함, 자괴감을 참으며 가족과 국가의 명령 앞에 복명해온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베트남전에서 다리가 잘린 채 절름절름 걸어오는 아버지, 소금을 안고 엎어지는 아버지, 감옥에 간 아버지, 사우디아라비아 모래바람 속에서 일하는 아버지, 가족을 등지고 도망치는 아버지까지,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위해 당신들의 꿈을 버리고 상처받고 고생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의 무능만 탓한다.
 
[사진=출판사 제공]


작가는 ‘소금’ 출간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기성세대의 과오는 많이 회자되는데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키워왔는지 모르는 것 같다. 치사한 걸 참고 야수적으로 일해서 지금의 부를 누리고 있는데, 그 안락함, 경제적 뒷받침이 된 편의성이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젊은이들이 모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소설에는 그의 그런 탄식이 곳곳에 배어 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 게 우리네 풍경이었다.”(본문 중)

‘치사해’ ‘빨대’ 같은 아픈 단어도 소설 곳곳에 말뚝처럼 꾹꾹 박혀 있다. 비극적인 것은 이런 말들이 가장 가깝고 사랑의 공동체인 가족을 향해 있다는 데에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가족이 자본주의 틀에 의해 뒤틀리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아버지의 가출은 당황스럽다. 사실 아버지의 가출 이전, 이미 가족은 없다. 자본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자식, 아내만 있을 뿐이다. 선명우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장애 가족들을 돌보며 자신의 가족을 만들어간다. 지워버렸던 ‘염부의 자식’을 자처하고 소금밭을 새롭게 일구며 오래전 꿈, 노래 부르는 삶을 시작한다.

가족형태,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이 새롭게 조명받는 시점에 ‘소금’은 다양한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mee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