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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계백의 그곳① 고향마을㉮--3충신 계백ㆍ성충ㆍ흥수 고향서 동문수학
[헤럴드경제=부여]서기 660년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다급하게 달솔 계백(階伯)을 불러 동쪽에서 진격해 오는 5만 신라군을 방어토록 명령했다. 그의 휘하에는 단 5천명의 결사대 뿐.

이미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전선으로 공격해올 것이라는 충신들의 충언이 오래 전에 있었지만 간신과 신라군 첩자들로 들끓은 사비왕궁에서는 사전 대비는 커녕 난상토론으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요충지를 모두 내줬다.

좌평 의직(義直)은 바다를 건너와 지친 당군을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백제에 겁 많은 신라군을 적은 군대로 저지해야 한다며 팽팽한 논쟁만 벌였다. 환갑 전후 집권 말기의 의자왕은 예전과 달리 빠른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계백 장군 초상화

기벌포(금강하구)에서는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나라군 13만이 강을 거슬러 사비로 진격하고 있었다. 백제 조정은 허겁지겁 병력을 둘로 쪼개 신라군과 당나라군에 맞서게 했다. 18만에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 계백 장군이 7월9일 황산벌에서 전사하고 불과 나흘만에 의자왕이 피란 떠난 사비성도 함락됐다. 그리고 18일 의자왕은 사비로 돌아와 김유신과 소정방 앞에서 정식 항복했다.

백제는 너무 쉽게 무너졌다. 나당군이 본격 진격한지 불과 수일 만에 항복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군사력이 뒤졌다고 해도 한 국가의 패망이 이렇게 쉽게도 가능한 것일까.

전하는 역사의 기록물은 그러했다. 어쩌면 소설 같은 결말 처럼 보였다. 너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에 오류가 있다 해도 오류를 딱히 뒤집을 뚜렷한 증거가 나와주지 않는게 문제다. 최후의 충신으로 기술되는 계백 장군은 황산벌전투에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한다. 그는 등장하자 마자 전사하면서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이야기도 아주 짧게 그친다. 하지만 그의 충절의 정신은 어느 시대든 단 한번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혜성 처럼 나타난 충신 계백 장군,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궁금했다.

계백 장군의 고향마을인 부여군 충화면 일대.

궁금하면 짐을 싸서 떠나는 필자는 부여를 세번째 찾았다. 역사공부를 위한 기행이다. 지난 겨울 부여를 세 차례 여행하면서 백제 멸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1400년 지난 지금 이렇다 할 자료도 없는 백제 멸망사, 그 몇몇 편린들만이라도 찾아 알아보고 싶었다. 특히 강을 따라 13만 당군이 쳐들어오고 자신의 군사 보다 10배나 많은 김유신의 신라군이 밀고 오는 황산벌, 그 전장으로 나서는 계백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부분을 가장 느껴보고 싶었다. 그는 이미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을 수도 있다. 오로지 마지막까지 목숨 바쳐 국은에 보답하는게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계백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계백 ‘계’자만 나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부여군청 김선화, 최미선 선생님께서 계백 관련 최신 책과 논문집을 두루 구해 주시고 현장도 안내해 주셨다. 문서에서 언급된 산꼭대기까지 다 찾아다녔다. 역사학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계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정도였지만,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답사도 필자에게는 흥미있는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우선 고향마을이라고 전해오는 곳부터 찾았다. 계백 장군에게도 우리가 몰랐던 고향마을이 있었다. 전설처럼 남아있는 고향, 부여군 충화면(忠化面) 표뜸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은 계백이 여기서 태어나 자랐다는 구전을 소개해줬다. 그리고 계백과 관련된 몇가지 흔적도 갖고 있다고 했다. 자랑스러워 했다. 이 곳 외에는 어디에서도 계백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데가 없으니 일단 계백의 고향은 이곳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솔직히 설렘도 있었다. 필자는 이렇다 할 관광지도 없는 이곳까지 가보리라고는 처음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계백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흔적을 제 발로 가서 더듬어본다는 것 자체가 좀 신비스러웠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본 것이다.

부여읍에서 충화면으로 나갔다. 규암을 거쳐 29번 국도로 임천 방면으로 가다가 우회전, 충화면으로 가는데 이름 모를 아름다운 저수지가 나타났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복금리저수지다. 호수라고 해야 할 정도로 컸다. 멋진 호수를 보며 잠시 ‘낭만적인 생각’에 잠겼는데 곧 이어 충화면사무소가 나타나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충화, 계백의 고향이라는 곳이다. 우선 면사무소에 들러 직원 도움을 받아 팔충사(八忠祠)에 들렀다. 팔충사 열쇠가 필요해서였다.

팔충사가 있는 지석리는 계백 장군이 출격 명령을 받고 5천 결사대와 함께 출정식을 갖고 출발했다는 곳이다. 이 팔충사는 원래 부여 부소산 삼충사 자리에 있던 사당을 헐면서 충화면민들이 십시일반 쌀과 돈을 모아 이 곳으로 옮겨 위패를 모셨다고 했다. 이곳 주민들이 아니었으면 이 사당 마저도 없을 뻔 했다.

계백 장군과 황산벌전투 5천 병사들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 팔충사. 지석리에 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위패가 모셔진 곳엔 먼지로 뒤덮였고 전반적으로 위대한 장군의 얼을 새길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빈약했다. 안타까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계백 장군의 위상 치고는 너무나 허술했다. 방치 상태나 다름없었다. 한 국가의 패망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장수의 정신, 그 사당이 이러했다.

팔충사는 백제시대 여덟명의 충신(팔충신)과 황산벌에서 장렬히 산화한 오천 결사대의 넋을 기리는 위패를 모신 곳인데, 매년 가을 이들의 넋을 추모하는 팔충제를 거행하고 있다. 팔충사 뜰에는 또 백제의 3충신 계백, 성충, 흥수가 갖다놓았다는 고인돌(괸돌)이 있어 이들 3충신의 흔적으로 주민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의자왕 시절 최대 충신이었던 계백과 성충, 흥수는 한 동네 출신으로 한 스승 밑에서 수학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계백 장군이 어린시절 무예를 닦았다는 고향마을 무쇠점.

팔충면 주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다시 면사무소로 돌아와 유정임(劉貞任) 면장님과 이 마을 출신 유성복 부면장님으로부터 계백 장군에 관해 전해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 면장님은 계백 장군은 충화면 천등산 아래 표뜸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면사무소 바로 근처 마을이다. 표뜸은 계백 장군이 ‘출전 명령을 받고 여기가 자신의 고향임을 표시하고 떠나갔다’고 해서 전해오는 이름이라고 했다.

(계백의 그곳① 고향마을에서 계속)
………………………
■ 백제의 신분 16관등 : 백제의 지배계층의 등급은 16관등으로 구분됐다.

△제1품=좌평(佐平) △제2품=달솔(達率) △제3품=은솔(恩率) △제4품=덕솔(德率) △제5품=한솔(扞率) △제6품=나솔(奈率) △제7품=장덕(將德) △제8품=시덕(施德) △제9품=고덕(固德) △제10품=계덕(季德) △제11품=대덕(對德) △제12품=문독(文督) △제13품=무독(武督) △제14품=좌군(佐軍) △제15품=진무(振武) △제16품=극우(剋虞)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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