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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제천 청풍문화재단지②--역사 속으로의 여행…조선시대 이미 찜질방이?
[헤럴드경제=제천]청풍문화재단지의 출입구인 팔영루(八詠樓)를 시작해 맨 안쪽 작은 봉우리에 있는 망월산성까지 두루 걷다보면 아름다운 청풍호와 어우러진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게 또 하나의 매력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연인, 나홀로 사색을 즐기기에도 더 없이 좋은 힐링투어 명소다.

청풍은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한 청풍명월의 고장이다.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자리잡은 청풍문화재단지. 망월산성에 있는 망월루.

팔영루는 원래 청풍의 관문으로 수몰로 이곳으로 옮겨 복원했는데, 그 상징성을 부여해 청풍문화재단지 관문으로 삼았다. 이 팔영루는 누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관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문(門)’이라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 누각은 기와 하나에도 번호를 붙여 옮겨 완벽하게 원래대로 복원시켰다는게 자랑거리다.

팔영루에 들어서면서 천정을 보면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데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 옛날 풍수도사이자 왕사였던 천공스님이 먼 훗날 청풍에 큰 수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해 지세를 눌러주기 위해 그려넣은 것으로 사나운 호랑이 대신 온순한 호랑이를 그렸다. 

입구 팔영루에 그려진 호랑이. 머리는 청풍으로, 꼬리는 밖으로 그려 재난을 막았다.

머리는 청풍관아 쪽으로, 꼬리는 바깥 쪽으로 향하게 해, 안쪽(청풍)에서 먹고 바깥쪽(외지)으로 배출하란 뜻으로 청풍의 수해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로 1970년대 한차례 수재 외엔 큰 수해가 없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청풍에서는 큰 부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모두 떠나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충주댐으로 모두 이주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옥을 지나 다음으로 간 곳은 보물 제 546호인 청풍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높이 3.33m로 후덕하고 자비로운 모습이다. 이 불상은 ‘너희가 가진 고통과 어려움을 모두 나에게 말하면 고통은 덜어주고 소원은 이뤄지게 해주겠노라’ 라고 하는 불상이란다.

석상에 삼배하고 앞에 놓여있는 검은 ‘소원돌’에 손을 얹어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자신의 나이 숫자 만큼 돌리면 꼭 한가지 소원은 이뤄진다고 한다. 소원을 빌며 돌리는 횟수를 세야 하는데 도중에 둘 중 하나를 놓치면 안된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 필자도 권유받고 소원을 빌어봤다. 이 불상에는 특히 자식이 없는 부인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불상은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 546호인 청풍 석조여래입상. 석상 앞의 검은 돌에 손대고 나이 숫자 만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어서 길을 따라 가니 조선후기 누정인 ‘제천 금남루(堤川錦南樓)’가 나온다.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라는 현판글씨가 있는 관청의 정문이다. 문은 좌우 3개로 구성돼 있다. 가운데 큰 문은 부사의 출입문이고 좌우 작은 문은 일반인이 이용했다고 한다. 문을 통과하면 금병헌(金屛軒)이 정면에 보이는데 부사가 집무 보던 건물이다. 

금병헌은 단청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단청비용만 해도 이 건물짓는 비용 만큼 돈이 들기 때문으로 관리들이 그만큼 청렴하게 지내려 했다는 것.

그 옆으로 객사(客舍)인 방 두 칸 짜리 응청각(凝淸閣)이 있다. 옛날 선비들이 와서 유숙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이웃 단양군수 시절 이 곳에 와서 묵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이름은 관수당(觀水堂)이었는데 퇴계 선생이 응청각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응청각 건물에서 재밌는 것은 뒤쪽 벽에 난 구멍이다. ‘고솔식 아궁이’다. 이 구멍은 난방을 위한 것으로 불덩어리 숯을 넣어 방바닥에 깔린 자갈을 데워 난방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찜질방의 원리가 이때부터 이미 적용된 것이라 해서 놀라웠다. 조상들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미 찜질방이 조선시대에 등장했다니 놀라울 수 밖에.

청풍의 관아 금병헌과 관청의 관문인 금남루(위쪽 왼쪽부터). 아래는 응청각 앞(왼쪽)과 뒤쪽. 뒤쪽 네모 구멍이 난 곳이 불덩어리 숯을 넣어 방을 찜질해 오늘날 찜질방의 효시가 됐다.

그 옆엔 또 하나의 보물인 한벽루(寒碧樓)가 있다. 가야금을 켜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익랑(翼廊)이 달린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다. 익랑은 ‘날개가 달린 누각’이란 의미로 누각에 오를 때 이 익랑을 거쳐 몸을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게 만든 누각이다. 지체 높으신 선비들이 누각에 오르면서 고개를 숙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익랑이 있는 3대 누각은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 그리고 이곳 청풍 한벽루다. 이름에서 보듯이 한여름에도 오르면 차가울 만큼 시원했다고 한다. 충주댐 만들기 전 남한강 변에 있을 당시 홍수로 경기도까지 떠내려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 한벽루 현판은 앞쪽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고 뒤쪽은 그 후에 다른 사람이 쓴 글씨라고 했는데 필체가 역시 확연히 달랐다.

이곳을 지나면 산성이다. 관수정이라는 정자를 지나고 연리지 소나무도 거쳐 올라간다. 이 산성에서는 우물과 많은 기와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고구려 지명을 딴 사열이산성이라고도 불렸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년)에는 ‘사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즉 고구려 산성을 신라가 함락,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삼국의 접경지대였던 만큼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망월산성 오르는 계단, 연리지, 청풍대교, 멀리 비봉산(위쪽 왼쪽부터 시계방향)도 보인다.

산성 위 정자에 오르니 주변 빙 둘러 청풍호의 경치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명산 금수산과 각종 봉우리, 청풍호와 청풍리조트 그리고 청풍대교의 조화가 멀리서 그림 처럼 다가왔다. 청풍명월의 경치를 만끽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골이 나온 고인돌인 향석리고인돌과 향교, 그리고 야생화단지까지 여유롭게 즐기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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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문화재단지 :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길 처지에 있던 마을의 문화재를 이전, 복원해놓은 곳이다. 지난 1986년에 복원해 27년째 전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관광명소다. 제천 관광 1번지다.

청풍문화재단지의 전경

청풍(淸風)은 고구려시대 때 사열이현(沙熱伊縣)으로 존재했던 역사 깊은 고장으로 청풍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때부터다. 고려시대 때 충주에 속하기도 했지만 후에 청풍부(府)로 승격될 만큼 중요한 고장이 됐다. 후에 제천시로 편입돼 지금은 제천시 청풍면으로 돼 있다. 잘 알려진 것 처럼 ‘청풍명월의 고장’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만큼 주변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해 특히 조선시대에는 선비와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고장이었다.

요즘은 전국의 사학전공 대학생들은 물론 초등, 중고생까지도 문화답사 필수코스다. 이곳의 최대 장점은 한옥, 고인돌, 보물, 산성 등 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를 다 체험할 수 있다는 것.

주변에 비봉산 모노레일, 금수산 정방사, 옥순봉, 청풍호 번지점프장, 청풍리조트, 박달재, 의림지 등 명소들이 즐비하다.

■ 청풍 한벽루(寒碧樓) : 우리나라 3대 익랑이 있는 누각으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보물 제 528호로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졌는데 1975년 원래 양식대로 복원했다.

왼쪽에 익랑이 달린 한벽루. 보이는 이 앞쪽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

이 누각은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이다.

누각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을 달았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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