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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뿐인 ‘성폭력피해 배상명령제’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A(14) 양은 6년 전 여름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지인이 뒤로 다가와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몸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종종 A 양을 강제로 추행했고 심지어 강간하려 하기까지 했다. 지난해에야 그를 고발한 A양은 가해자에게 치료비 등을 배상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법원에 배상명령을 신청했다. 하지만 최근 있었던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신청을 각하했다.

범죄로 인한 피해에 대해 별도의 민사소송 없이 형사재판 선고와 함께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성폭력범죄 피해자 배상명령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회복시켜주기 위해 3년 전 도입됐지만 성범죄의 특수성, 위자료 산정의 어려움 등으로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제도가 시행된 지난 3년 간 전국 법원에 접수된 성폭력 피해자의 배상명령 신청은 173 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간 전국에서 연간 2만여 건의 성범죄가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터무니 없이 낮은 수치다. 그나마 신청된 배상명령 중 인용된 건수는 34건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피해자는 별도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피해를 구제받거나 아예 배상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성폭력 피해는 합의의 대상이 아닌 배상의 대상이라는 인식 하에서 도입된 제도지만 이처럼 유명무실해진 이유 중 하나는 성범죄의 특수성 때문이다.

지난해 중곡동 주부 살해범 서진환 씨의 피해 유족 측 변호인은 “성범죄자 상당수가 배상을 해 줄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안 돼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선 전담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는 2차 피해를 당할까봐 형사고발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는데 배상명령은 더 하지 않겠느냐”며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을 배려한 심리가 전제돼야 제도가 실익을 거둘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배상명령을 신청하더라도 법원에서 막히는 이유는 피해액을 제대로 산정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서울의 한 법원에서 성폭력 사건을 담당하는 한 판사는 “배상명령은 민사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형사재판 절차에서 배상액을 정하기 쉽지 않을 뿐 더러, 재판 지연 등의 문제로 각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폭력 등 형사사건 전문의 한 변호사는 “피해액 산정이 어렵고 재판이 늦춰진다는 이유로 이를 판단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원의 직무유기”라며 “배상명령 신청이 들어온 성폭력 사건은 피해액 산정을 위한 심리 절차를 마련하는 등 제도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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