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노베이터’로 불려온 정조(1752~1800)의 비밀편지가 경매에 나온다.

미술품 경매사 K옥션(대표 이상규)은 정조가 1796~1800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인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편지 297통을 오는 27일 강남구 신사동 경매장에서 열리는 봄 경매를 통해 판매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최대 정적에게 보냈던 정조의 비밀 어찰 297통과 피봉을 6권으로 묶은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의 경매 추정가는 12억~20억원이 매겨졌다. 문화재로, 또 학술적 자료로써 그 가치가 지대하기 때문이다.

정조와 심환지 간의 ‘핫 라인’을 보여주는 이 서찰은 지난 2009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대학원에 의해 세상에 최초로 공개되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정조가 수백 차례에 걸쳐 편지를 쓴 인물이 자신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심환지라는 사실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심환지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비밀 편지에서 이들 반대세력을 끌어안으며, 놀라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긴박감 넘치는 어찰 속 상황은 정치적 수가 대단히 높았던 군왕의 면모를 낱낱히 드러낸다.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도 정조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으며,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 있는 상소문은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준 문구 그대로였다. 


정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신하의 입을 통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과연 ‘정치 9단’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여야가 끝없이 대치국면만 드러내고 있는 오늘 이 ‘불통’의 시대에, 정조의 비밀서찰은 반대파, 독살설의 배후인물로까지 의심받고 있는 정적까지 동반자로 포용하고 리드해 가며, 정국을 이끌어 간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하들의 성향과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어찰을 통해 소통과 조정을 이루며 뜻을 관철했던 국왕의 유연한 대응은 이 시대에도 주효할 듯하다.

오는 16~26일 서울 K옥션 전시장에서 정조 어찰첩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 (02)3479-8824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