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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란 선임기자의 아트 앤 아트> 통일 염원담아…철책 불 밝히다
이은숙 ‘정전(停戰) 60년…’ 23일부터 임진각 설치미술전
브란덴부르크 ‘사라진 베를린…’
대형 조명설치작업으로 큰 반향

폴리에스테르 필름·형광실 이용
피난민 사진·이산가족 사연새겨
이별의 아픔·재회의 희망 그려





설치미술가 이은숙(57). 국내에선 그의 이름이 생소하지만 독일및 유럽 미술계에선 제법 유명하다. 지난 2007년 가을,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대형 조명설치작업인 ‘사라진 베를린 장벽’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높이 4.5m, 길이 25m의 이 작품은 조국 분단으로 생이별의 아픔을 겪은 한국의 이산가족 5000명의 사진과 이름을 담았기에 독일및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구촌에 남은 유일 분단국인 한국의 이슈를, 통독의 현장이었던 브란덴부르크에서 풀어낸 그의 작업은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1면을 장식했다. 또 BBCㆍ로이터ㆍCNN에도 보도됐고, 베를린의 한 방송은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방영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이은숙은 고국인 임진각 민통선 철책에서 오는 23일 설치미술전을 펼친다. 정월대보름 지신밟기를 하며 소원을 빌듯, 대보름 하루 전에 자유의 다리 철책선에 ‘정전(停戰) 60년…그리운 북쪽 가족을 부른다’라는 조명작업의 불을 밝히며 겨레의 염원을 기원할 예정이다.

▶독일 국민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길 염원하며=이은숙은 투명 폴리에스테르 필름에 다양한 빛깔의 형광실을 압착시킨 뒤 자외선 발광체를 삽입했다. 발광체가 빛을 발하면 북녘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의 이름과 사연, 6ㆍ25 피란민의 사진이 형광실과 함께 도드라지며 이별의 아픔, 재회의 희망이 오롯이 드러나게 된다. 이같은 조명작업은 이은숙이 오랜 실험 끝에 창안한 것으로, 섬유예술(이화여대)과 공예(홍익대)를 전공하며 여러 장르를 부단히 오가며 터득한 독자기술이다. 

독일을 무대로 활동해 온 설치미술가 이은숙이 임진각 철책에 20m 길이로 설치할 조명작업의 시뮬레이션<사진 왼쪽 위>. 정전(停戰) 60년을 맞아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는 색다른 특수 조명작업으로 오는 23일 불을 밝힌다. 아래는 통독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에서 지난 2007년 시행했던 작업.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한글 자모 모양의 구조물로 이뤄질 이번 작품에 대해 작가는 “얽혀 있는 실은 고달픈 한국현대사의 상징이자, 그 실타래에서 풀려나고픈 희망과 염원을 의미한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임에도 한(恨)을 간직한 실향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철책선을 따라 20여m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은숙은 당초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에서 작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군(軍)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임진각으로 바꿨다.

이은숙이 이처럼 분단과 이산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집안 내력 때문이다. 아버지는 함흥에서, 어머니는 평양의대를 다니다가 피란을 내려와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96세로 타계하기까지 북에 두고온 가족을 몹시도 그리워했다. 작가는 “아버지는 월남 전 북에서 결혼해 자식을 넷이나 두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북쪽 자식들의 생사를 알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모두 허사였다”며 “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거의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두고온 자식을 생각해 일부러 그러신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임진각 작업은 그 회한을 풀어드리기 위함이자, 이복 언니ㆍ오빠들에 대한 그리움, 모든 이산가족들의 애달픔을 달래기 위한 작업인 셈이다. 개막식(23일 오후 6시)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슈테판 드라이어 독일문화원장이 참석해 스피치와 점등식을 주관한다. 전시는 3월 10일까지.

▶오뚝이처럼 쓰러졌다 일어서며 세계를 공략=브란덴부르크에서의 조명설치작업으로 이은숙은 독일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후에도 굵직한 전시에 참여했다. 허나 국내에선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다. 공모전에도 수없이 응모했고, 개인전도 매년 열었는 데도 말이다. 비닐과 형광실을 이용한 그의 특이한 작업은 “유치하다”는 평만 받았다.

실험성이 강한 그의 작업을 눈여겨본 건 독일에서 날아온 큐레이터였다. 프랑크푸르트의 뮤지엄에서 ‘한국섬유예술전’을 기획 중이던 큐레이터는 ‘엄청난 공력이 투입된 이은숙의 작업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작업’이라며 1999년 전시에 그를 초대했다. 그게 인연이 돼 베를린 동서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조명미술제에 초대됐고, 2000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 캐나다와 독일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2007년에는 꿈에 그리던 브란덴부르크 작업을 실현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건 부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작업하기까지 굴곡이 참 많았다”는 그는 특히 1986년 4월 4일을 잊지 못한다. 6살, 2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작업하던 그는 개인전 일정을 앞두고 마음이 급했다. 마침 작은 아들이 낮잠을 자길래 작업을 서두르며 고체 파라핀을 가스불에 올려놓았던 것. 파라핀은 가스불에 올려놓으면 매우 위험한데 상식이 없었다. 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는 사이, 파라핀이 기화하면서 아파트에 큰 불이 난 것. 황망히 불을 끄느라 이은숙은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다. 대소변까지 남이 받아줘야 할 정도로 화상이 심했고, 수술을 여섯차례나 받았다. 의사는 오른손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아, 작가로서 끝났구나 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꿨는데 예수께서 마을동산에 오셨다는 거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아주 강렬한 레이저 빔을 쏴주시는 거였다. 꿈 속이었지만 너무 선명했다.”

그리곤 근육들이 차츰 회복됐다는 것.

그는 말한다. “4월 4일 오후 4시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e-메일 아이디도 444다. 사고 이후 국내 공모전에 수없이 떨어지면서 작업의 끈을 놓치 않았던 것도 죽음의 문턱까지 가 봤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생이고 하고 싶은 작업이 많다. 2018 평창올림픽 기간 중 DMZ 조명설치, 아우슈비츠에서의 홀로코스트 프로젝트 등 모두 엄청난 노력과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허나 꼭 할 거다. 아, 광화문 옆 담벼락에서의 설치작업은 금년에 꼭 하려 한다. 될 거라 믿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지니까.”

오뚝이 같은 그의 눈이 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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