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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해주의 '희망가족'> 스페인에 짓밟힌 수수께끼의 땅…태양의 후예들, 옛 영광 되찾을까
<39> 잉카제국의 심장부…페루 쿠스코
잉카시대 돌벽 위의 스페인 정복자 건물
지진에도 살아남은 견고함 너무 놀라워

2000년대부터 세계적 관광지로 각광
매년 200만명 이상 몰려…개발 몸살도

500년전 문화 재현한 ‘태양의 축제’
잉카제국 부활 염원 담은 몸짓 인상적



[쿠스코(페루)=이해준 문화부장] 한국을 떠나 세계일주에 나선 지 9개월로 접어들 무렵, 과거 잉카 제국의 심장부였던 페루 쿠스코(Cuzco)로 향했다. 멀고도 멀었다. 남쪽 볼리비아 국경 마을인 코파카바나에서 출발, 페루 푸노를 거쳐 버스로 10시간 걸렸고, 나중에 쿠스코에서 태평양 연안의 리마로 가는 데는 21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안데스 고원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쿠스코는 오래되고 낙후한 모습이었다. 중심지만 벗어나면 도로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고, 낡은 집들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기반시설이 부족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쿠스코의 진짜 모습이었다. 더 개발되면 관광지로 탈색할 것이다. 마치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가 두터운 먼지를 뚫고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거기엔 ‘잊혀진 태양의 제국’ 잉카의 신비로움과 함께 슬픔, 정복자들에 대한 분노가 복합적으로 배어 있었다.

▶처절한 문명 파괴의 현장, 쿠스코=쿠스코는 ‘돌의 예술’의 도시였다. 중심 광장이자 여행의 출발지인 아르마스 광장엔 과거 잉카 제국의 왕궁과 사원이 있던 자리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교회와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 기단부는 잉카 시대의 벽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방울의 물도 새지 않도록 거대한 돌을 정밀하게 깎아 맞춘 것이 놀라웠다. 쿠스코를 초토화시킨 지진에도 살아남은 구조물이었다. 색깔도 달랐다. 기단부는 원래 돌 색깔을 드러낸 반면, 그 위의 스페인 건물엔 흰색이 칠해져 있었다.

견고한 잉카의 토대 위에 스페인 정복자의 건물이 올라앉은 모습은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박물관 건물도, 옛 스페인 식민지 정부 건물도, 교회 건물도 잉카의 돌벽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돌을 이렇게 깎아 맞췄을까 하는 신비로움과 함께, 잉카의 슬픈 역사가 가슴 한쪽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잉카의 화려한 황금도 표현하기 어려운 애잔함을 전해줬다. 스페인의 잉카 정복은 인류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가장 참혹하게 진행된 문명 말살이기 때문이었다.

 
쿠스코 중앙의 아르마스 광장에서‘ 태양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잉카 전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인물상이 잉카의 부활을 상징하는 듯하다.

잉카 제국은 12세기 초 페루 고원 지방에서 시작해 15~16세기 초 전성기를 이룬, 남미 최초의 통일 왕국이었다. 1400년대 중반엔 남미의 광활한 서부 지역을 장악, 정치ㆍ사회ㆍ문화적 기틀을 마련했다. 유럽이나 아시아 제국과 같은 거대 왕국이었다.

스페인의 침략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첫 전투에서 패한 잉카의 아타왈파 왕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협상에 나섰다. 스페인은 자국의 왕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협상이 어려워지자 스페인은 아타왈파 왕을 감금하고, 그 방을 황금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잉카는 방 1칸을 채울 황금에 이어 방 2칸을 채울 은을 갖다주지만 스페인은 약속을 어기고 왕을 살해하고 전쟁을 벌인다. 이들의 목적은 협상이나 평화가 아니라, 황금과 정복이었던 것이다.

스페인은 쿠스코의 궁과 사원, 건물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잉카의 건축술이 워낙 뛰어나 벽체와 기단부를 그대로 사용했다. 1950년 대지진이 발생해 스페인 건축물을 비롯해 도시의 3분의 1이 파괴됐지만 잉카 건물들은 멀쩡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쿠스코 구시가지를 돌아보면서 눈길은 항상 아래쪽에 머물렀다. 스페인 건축물보다 잉카 돌의 예술이 눈을 사로잡았다.

▶잉카의 영혼이 숨 쉬는 ‘신성한 계곡’=잉카 유적에 대해선 쿠스코와 ‘신비의 도시’ 마추픽추가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 인근 지역에 경이로운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고, 그것이 잉카의 실체를 보다 분명히 보여줬다. 그곳을 돌아보기 위해 다국적 여행자들과 ‘신성한 계곡(Sacred Valley)’ 투어에 나섰다. 하루종일 걸리는 투어다.

 
쿠스코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로, 잉카 시대에 쌓은 담이나 벽 위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이 잉카 시대의 벽은 1950년 대지진 당시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아 그 기술력을 입증했다.

‘신성한 계곡’은 안데스 고원에서 아마존으로 흘러가는 우루밤바 강(Rio Urubamba) 유역 100㎞에 이르는 협곡으로, 잉카 제국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좁고 길지만 강변에 비옥한 농토가 조성돼 농업과 목축은 물론 거주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쿠스코에 접근하려면 이 계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곳곳의 요충지에 도시와 성채를 만들어 쿠스코를 보호하도록 했다.

버스는 먼저 그 계곡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정차했다. 깎아지른 산이 양쪽에 버티고 있는 가운데 아래쪽 강변으로 좁은 농경지가 띠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중년의 메스티소인 릴리 가이드는 “안데스는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곳이지만, ‘태양의 신’이 이 계곡을 허락했다”며 “잉카인들은 이를 신성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진짜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이어 피삭과 우루밤바, 올란타이탐보 등 신성한 계곡의 잉카 유적지들을 차례로 돌아봤다. 가는 곳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급경사의 산비탈에 어마어마한 계단식 농경지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 그냥 걸어서 올라가기도 쉽지 않은 비탈에 바위를 쌓아올려 농경지를 만들었는데, 돌을 다룬 솜씨가 가히 예술이었다. 모양이 다른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 틈이 없이 완벽하게 쌓아올렸다.

올란타이탐보는 잉카식 도시 설계의 최고봉이었다. 정상에 ‘태양의 신전’을 배치하고, 그 아래 산비탈에 만든 계단식 경작지에선 화초 등 장식용 초본을 재배했다. 농작물은 더 깊숙한 계곡에서 생산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상에는 30t이 넘는 엄청난 돌로 신전을 만들었다. 돌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이 처리한 것과, 그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린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를 처음 본 스페인과 유럽 학자들은 믿을 수 없어 ‘불가사의한 것’으로 치부했다. 잉카가 축적해온 기술과 문화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 비밀이 해명되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살아나는 태양의 축제, 부활하는 잉카=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잉카 유적은 2000년대 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인구 50만명의 쿠스코에 해마다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면서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실제 필자가 머문 3박4일 동안 마추픽추를 비롯한 일대 유적에 관광객들이 넘쳐났다.(마추픽추 여행기는 다음 편에 별도로 소개한다)

잉카 문명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500년 전의 문화를 재현하는 행사도 활발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년 6월 24일 동지 전후로 열리는 ‘태양의 축제’다. 동지는 잉카의 최고 신인 태양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날로, 잉카력으로 1월 1일이다. 한국의 ‘설’과 같은 날이다. 이 축제는 쿠스코를 비롯해 올란타이탐보 등 주요 유적지에서 열리며, 거의 모든 주민이 참여한다.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때(2012년 6월) 태양의 축제로 쿠스코 일대가 들썩이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학생과 주민들이 곳곳에서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군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오후만 되면 공원이나 주요 건물의 뒤뜰은 거대한 연습장이 됐다.

나흘째 날 축제의 문이 열렸다. 아르마스 광장의 가장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광장엔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사람들이 도로변을 가득 메웠다. ‘둥둥둥’ 요란한 북소리를 동반한 전통음악에 맞춰 잉카를 재현한 행렬이었다. 전통복장을 하고 머리에는 콘도르의 깃털로 장식한 잉카의 후예들을 필두로 다양한 행렬이 이어졌다. 선조들의 전통농법을 재현하고, 잉카의 전사를 형상화한 거대한 동상을 앞세우기도 하며, 높은 목발 위에 올라 전통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 뒤로 전통춤을 추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사라진 ‘태양의 제국’ 잉카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비극적인 역사를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려는 잉카 후예들의 몸짓 같았다. 쿠스코의 좁은 골목과 신성한 계곡에 잠들어 있던 잉카의 혼이 깨어나는 듯한 강한 여운을 남겼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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