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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인디시 보다 맛있는 디저트, 산문
좋은 글 쓰고자했던 작가의 자책
대학시절 청강생과의 풋풋했던 사랑
세계 여행중 느꼈던 우연한 깨달음

시인 유안진·소설가 이혜경이 전하는
소소한 일상속 깊고 따뜻한 사색



“산문은 시보다 편하고도 정겨워서 좋다. 마치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구경하는 여행을 누린 끝에 돌아봐서, 소박하고 편안한 제 집이 가장 좋다고 새삼 깨닫게 되듯이 말이다. (…)산문은 모든 글 장르의 본적이고 고향이고 어머니이고 피붙이 식구 같다고 말이다.”

유안진 시인이 5년 만에 산문집 ‘상처를 꽃으로’(문예중앙)를 펴내며 산문에 대한 정겨움을 털어놓은 말이다. 시인만 그렇겠는가. 바짝 긴장하며 오그라든 채 시와 소설을 읽어내다가 산문을 만나면 탁 풀어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가 되니까 말이다.

유안진 시인의 산문집 ‘상처를~’과 소설가 이혜경의 산문집 ‘그냥 걷다가, 문득’(강)은 일상 속에서, 혹은 여행의 길에서 건져올린 잘 우러난 차향과 같은 깊고 따뜻한 사색의 결을, 또 사적인 얘기가 주는 은밀한 발견의 재미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유 시인이 지난 1년간 나름 의지를 갖고 시도한 프로젝트(?)가 있다. “딱 1년만이라도 양말 한 짝도 안 사면서 살아지는지” 스스로를 실험해본 거다. 그러다 장롱 속에서 대학생 때 입던 옷도 한두 가지 발견한다. 그걸 보며 좋은 글을 써야지 다짐했던 젊어 푸르렀던 때를 떠올린다.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 “할 수 있는 짓이 고작 이런 짓뿐인가”고 시인은 자책하고 자문한다.

시인의 사랑 얘기도 설핏 비친다. 물수제비를 잘 뜨던 소년과 대학 강의실의 청강생, 재직 중인 지방여고로 찾아와 결혼을 발표한 남자의 얘기는 환상과 엮여 시가 된다.

“머리에 꽂아주던 불봉숭아 분홍꽃이/물수제비 뜨던 소년의 강물이/보낸 적 없는데 가버렸다 하지 마라//(…)//이별에는 한 생애가 턱없이 모자라서/사실보다 찬란한 허구일 수밖에는/생시보다 점점 더 생생해지는데”( ‘추억도 환상이다’)

누구는 천형이라 했던 시인과 메밀을 비교한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메밀은 흉년의 구황작물이란 점에서 시인과 닮았다는 것. 메밀은 척박한 산비탈에 밭고랑도 안 만들고 괭이로 긁적여 사방팔방 뿌려 파종하는데 클 테면 크고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잡초 속에서 자란다. 잡초와 더불어 끈질기게 자라난다는 생리가 시인 생리 그대로다. 시인이 제 피를 마시고 목 놓아 울며 시를 쓰듯 빨간 빛깔도 그렇고, 잎과 꽃, 알까지 못 먹는 게 없는 게 시와 닮았다. 그런데 시집을 안 사고, 시를 안 읽는 시대에 시인은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소설가 이혜경의 첫 산문집 ‘그냥 걷다가, 문득’은 작가의 잔잔한 소설의 맛을 즐겨온 이들에겐 특별한 디저트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 깨끗해서 비춰보게 하는 힘, 무겁지 않은 적절한 깊이가 산문의 정수를 보여준다. 작가의 섬세하고 밝은 눈, 마음의 결만으로도 등짝이 따뜻해진다. 거기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다.

족자카르타에서 자카르타로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역내. 기차는 연착이다.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과 열차에서 내릴 손님을 기다리는 베짝군들이 옹송그리고 앉아있는 풍경이 한순간 흔들린다. 검정 인조가죽 미니스커트에 딱 붙는 검정 탱크톱을 입은 아가씨가 플랫폼을 가로질러 나가고 있다. 어깨를 드러낸 차림새가 드문 곳에 여자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베짝꾼들의 눈길이 그 여자를 따라 움직이고 최면에 걸린 듯 휘둘린다. 여자가 막 스쳐지나간 마지막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얼얼해진 내심을 감추지 못하고 씩 웃는다. 작가는 남자의 웃음에 멈춘다. “이제껏 동료들 틈에 파묻혀 부족한 대로 무사하게 넘기던 나날, 그의 생은 갑자기 누추하고 비천한 것이 되어버렸다. 잠깐 스친 그 여자 때문에, 그는 그동안 못 보았던 ‘타인의 눈’으로 자기 삶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안진(왼쪽) 시인과 소설가 이혜경의 산문집이 나란히 나왔다. 정색하고 읽지 않아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산문은 작가가 걸어낸 길과 사유의 편린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여행을 즐기는 작가답게 세계 각지에서 경험한 일, 길에서 만난 이들, 우연한 깨달음에 관한 얘기가 많다. 자바섬의 디엥 고원에서 만난 차를 파는 여인, 네팔의 산간에서 만난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길 위에서 울고 있던 아이, 발리섬의 여행사 사장이 낯선 이를 위해 준 사롱의 이야기는 아련하고 정겹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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