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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만, 40년지기 ‘카메라’ 는 순결이자 죽음, 셧터 누르는 순간이 가장 두려워
[헤럴드경제= 정태일 기자] 2010년 초가을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평일이면 바삐 돌아가는 서울 광화문 거리도 주말이면 한적함을 넘어 황량하기까지하다. 이곳에서 기자는 우연히 김중만(59) 사진작가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카메라 한 대를 들고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마치 한 마리 들개 같았다. 흔히 레게머리라 하는 데드락 헤어스타일에 온몸을 문신으로 새긴 모습. 예술가적 풍미가 엿보였지만, 일반인 같지 않은 이질감 또한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자신 혼자 다른 시공간에 온 듯 세상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는 피사체를 추적하는 야수의 기질과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잠깐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김 작가를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작업실에서 다시 만났다. 작업실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강한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어 울창한 나무들과 여기저기 놓여진 큰 돌들 그리고 작업실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얀 새들. 강남 한복판에 165㎡(구 50평) 남짓의 작은 숲이 옮겨온 느낌이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와의 만남. 그렇게 3년이 세월이 지난 후 이 곳에서 만난 김 작가는 훨씬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레게머리 대신 부스스한 스타일. 세월의 흔적이 쌓인 때문일까. 훨씬 완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카메라를 잡는 순간 눈빛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뭐든지 반평생 함께 하면 벗이 될 법도 한데 그는 카메라를 잡을 때면 3년 전의 눈빛으로 돌아갔다. 40년 가까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김중만. 프랑스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고, 대스타들이 앞다퉈 그의 카메라 앞에 서보기를 원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지만 카메라 앞에선 구도자(求道者)와 같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카메라를 ‘순결이자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사진가 김중만... "카메라는 순결이자 죽음"

김중만 작가가 처음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프랑스 대학 유학 시절이었다. 당시 기숙사 동료가 풍경사진 인화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에 암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을 받았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서는 캔버스 준비도 하고 밑그림도 그리고 색을 입히는 등 여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와 달리 사진은 빨리 나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림 그리는 데 최소한 두 시간은 걸리는데 사진은 20분도 안돼 하얀 도화지에 그림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순간 이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라고 직감했다.”

김 작가는 이처럼 처음에는 사진을 그림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붓 대신 조리개와 셔터로 세상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 때부터 김 작가는 카메라와 지금까지 매순간 함께 해왔다.


하지만 당시 전공 교수들의 만류가 심했다고 한다. 교수들은 “사진보다 그림이 더 힘이 있다”는 이유로 김중만의 사진찍기를 말렸다. 1970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진이 예술로 인정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사진이 비로소 예술 범주에 들어올 수 있었던 시기는 20년 뒤인 1990년대였다.

“나는 원래 주변 시선에 크게 신경 안 쓴다. 붓대신 카메라를 들었는데 계속 해야겠다 싶었다.”

될성부른 떡잎이란 표현을 이럴 때 쓸까. 김 작가는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고, 만 23세에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됐다.

“사진하겠다고 한 지 20년 후 나를 말렸던 교수들 찾아가니 그때 사진 하길 잘했다며 지금 동료들 중에 밥먹고 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


김 작가가 미술계를 넘어 대중 문화계에서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시기는 2000년대였다. 40대 나이에 집 한 칸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가장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래서 2000년 명함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내서 상업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미 실력을 인정 받고 시작한 일이라 탄탄대로였다. 상위 1% 톱스타들과 패션, 광고 등 수많은 작업을 하며 연간 15억원 이상 버는 고소득자가 됐다. 2007년 1000만 관객 영화 괴물 등 인기 영화 포스터를 찍을 당시 17억원까지 벌기도 했다. 김 작가는 수입 면에서 당시가 절정이었다고 했다.

그러자 스튜디오 키우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서울 강북에 집 한 채 사는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그는 돌연 상업사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말대로 경제적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지만 그는 인생에서 또 한 번의 중요한 선택을 내렸다.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사진가일뿐인데 이목이 집중되는 게 불편했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에 착수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마지막 허영심을 버리자는 의미로 레게머리를 잘랐다.”


그가 바꿔잡은 방향은 순수사진이었다. 누가 돈을 주고 정해놓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돈과 상관 없이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는 게 더 중요하다고 깨달은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셀레브리티들과 화려한 무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진가로 세계에 나가 각 나라 대표하는 사진가들과 전쟁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다. 사진가로서의 끝을 보고 싶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사진 점수를 70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업사진에서 은퇴하고 나서 60점에서 70점까지 왔다. 목표는 90점이다. 순수사진으로 키를 돌린 뒤 김 작가는 각종 오지를 포함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예술사진에 전념하고 있다.

매번 낯선 곳에서 촬영하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카메라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카메라는 죽음이다. 두려움의 깊이가 죽음과도 같다. 피사체는 일상부터 추상까지 매우 다양하고, 프로젝트 콘셉트에 충실해 사진 찍을 때도 있고, 100% 내 세상에 빠져 사진 찍는 경험도 있지만 카메라 앞에 두려운 것만은 똑같다. 따라서 카메라는 나에게 있어 순결이고 죽음이다.”



■아들 김중만..."박애주의자 아버지, 아직 그분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김 작가에겐 카메라 못지않게 경외심을 갖는 대상이 있다. 바로 아버지이다. 외과의사였던 아버지는 평생을 오지에서 몸이 아픈 사람을 고치는 데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김 작가는 아버지를 박애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김 작가는 1971년 중학교 3학년 때 빈민국 의료지원을 하러 간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했다. 당시 부르키나파소에는 학교가 없어 식민 지배를 했던 본국 프랑스 시골 학교로 유학을 갔다. 김 작가가 어떻게 보면 예술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에 아버지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김 작가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말하기를 매우 주저했다.

“외과의사인 아버지가 하셨던 의술이 훨씬 더 숭고하다. 그 분 앞에서 난 한 번도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진가이다. 난 그런 사진가 중 한 명인 셈이다.”


김 작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2000달러가 전부였다. 생전에 아버지는 큰아들이었던 김 작가에게 2000달러밖에 물려 줄 게 없다고 고백했다. 원망할 수도 있지만 김 작가는 되레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외과의사 아들일 수 있다. 철저한 이상주의자셨던 그 분은 인생 절반을 오지에서 어려운 사람 고치느라 많은 재산을 만들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이지만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그 역시 자신의 자녀들에게 똑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다.

“나도 아이들에게 2000달러 정도만 물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 분 따라가려면 아직 위선이나 허영심을 다 버리지 못했다. 아직 그 분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이와 함께 세상을 보는 시선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소외되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수많은 유명 톱스타들과 작업을 해봤지만 셀레브리티보다는 그렇지 않은 분들에 더 애정이 가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아버지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 김중만...’나를 두번 추방한 나라,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1980년대 김 작가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전시회를 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장발의 남자가 귀걸이를 한 것은 당대 충격이었다. 마치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것처럼. 또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던 김 작가가 사전 신고 없이 전시회를 하는 것도 문제가 됐다. 그는 결국 일본으로 추방됐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두 번째 추방이었다. 1986년 북한에서 신상옥 감독, 최은희 부부가 탈출할 당시 김 작가는 신 감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당시 안기부는 이를 문제삼아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두 번이나 추방당한 것이다.

“한국에서 두 번째 추방당했을 때 삶에서 가장 힘들었다. 이후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되고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되는 등 심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흔들리는 그를 잡은 것은 청년 시절 아프리카, 프랑스 생활에서 다져진 낙천적 성격이었다. 미국 체류 중 차 한 대가 언덕에서 올라왔다. 그 차는 헤드라이트가 하나 고장난 외등차였다. 사진을 찍었다. 외눈박이 자동차가 어둠을 헤쳐가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자신을 두 번 버렸던 나라지만 김 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있다. 오히려 “좋은 사진을 찍으라고 그런 경험을 시켜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요즘 들어 내가 상업사진 은퇴를 2, 3년 더 빨리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우리 땅과 나의 뿌리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않았을까.”

그래서 최근에는 국토 곳곳을 다니며 카메라에 담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다. 1년에 각종 행사 초대장이 60장 이상 오지만 한 두 번 가는 게 전부다. 자유롭게 음악 듣고 책 보는 시간조차 없다. 얼마전에도 제주도 중문, 경상북도 청송 주왕산, 독도 등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그는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사진에 대한 갈증과 부족함이 부끄러움으로 나타난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세상을 좋은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것이다.”



■자연인 김중만..."자연이 좋다. 나은 꿈은 목수"

김 작가는 그래서 생계를 위해 상업사진을 찍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치열하다고 말했다. 환갑을 앞둔 그는 지금도 200㎏ 무게의 장비를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그는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가 되서까지 사진을 찍을 마음은 없다.

“사진 점수 1점 올리려면 1년 걸린다. 지금 70점인데 90점까지 가려면 20년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사진 찍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40년 사진가 인생을 산 김 작가의 향후 목표는 목수가 되는 것이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소년은 미술학도에서 사진가로 청년기를 맞으며 지금까지 왔다. 이제 목수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날을 꿈꾸고 있다. 


“나무 냄새가 좋고, 자연이 좋다. 주머니에 가벼운 콤팩트 카메라 하나만 들고 자연 속에 살고 싶다. 100㎏가 넘는 장비 대신 스니커즈에 티셔츠 몇벌만 들고 공항에 온 (평범한)그들처럼 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김 작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전쟁을 준비하는 전사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 사진가 이름으로 정상에 오른 뒤 서서히 나를 내려놔 자연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오늘도 제몸처럼 대하고 그토록 두려워하며 순결 자체라 말하는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나선다.

글=정태일 기자/killpass@heraldcorp.com
사진=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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