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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칠현산 칠장사--어사 박문수 3수생 恨 풀다
[헤럴드경제: 안성=남민 기자]어사 박문수, 이번 과거시험 3수생이다. 합격이 절대절명의 과제다. 그의 나이 32, 이미 25살과 28살에 낙제했던 아픔이 있다.

조선 최고 어사가 된 박문수(朴文秀, 호 기은ㆍ耆隱)의 출세 길은 이렇게도 험난했다. 서른 넘은 나이에 홀어머니 밑에서 마냥 책만 펴놓고 세월을 보낼 수가 없었다.

박문수는 마음 속으로 다짐다짐 하며 세번째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길에 오른다. 이번엔 결단을 내야 했다. 가슴 조아리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 어머니는 아들의 과거길에 간식으로 찹쌀유과를 싸주며 간절한 부탁을 했다. “칠장사에서 꼭 나한전에 기도하고 가거라”

눈 덮인 칠현산 칠장사 전경

박문수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기로리(耆老里)에서 태어났다(윤민용 향토사학자 고증). 한양길에 오르면 경기도 안성 칠현산을 넘어 칠장사에서 첫 밤을 묵는다. 약 30km 거리다. 첫번째도 그랬고 두번째도 그랬다. 그런데 이전의 두번은 절에서 잠만 자고 떠났다. 그리고 낙방했다. 이번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대로 나한전 앞에 섰다. 선비의 자존심이 있지, 도적떼 출신의 이곳 칠장사 나한전에게 기도를 올리다니…한참 마음을 정리한 박문수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간식 유과를 나한전 앞에 불쑥 꺼내놓고 기도를 올렸다.

요사채에서 잠든 그날 밤 꿈에 이 절을 번창시킨 혜소국사가 나타나 과거시험에 나올 문제의 답을 명문장 7행으로 읊어주며 “마지막 한 행은 너 스스로 완성하라” 하고 사라진다.

“落照吐紅掛碧山 / 寒雅尺盡白雲間 / 問津行客鞭應急 / 尋寺歸僧杖不閒 / 放牧園中牛帶影 / 望夫臺上妾底鬟 / 蒼煙古木溪南里 / OOOOOOO(短髮樵童弄苖還)”

“낙조토홍괘벽산 / 한아척진백운간 / 문진행객편응급 / 심사귀승장불한 / 방목원중우대영 / 망부대상첩저환 / 창연고목계남리 / OOOOOOO(단발초동농적환)”

“토해내 듯 넘어가는 붉은빛은 푸른산에 걸리고 / 기러기는 흰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 나루를 찾는 나그네는 채찍이 급해지고 / 깊은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네 / 초원에서 풀 뜯는 소는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 댓돌 위에서 서방 기다리는 아낙의 쪽머리는 뒤로 처진다 / 저녁 푸른 연기는 고목 사이 남쪽마을 계곡에 피어오르고 / OOOOOOO(까까머리 아이는 풀피리 불며 돌아오누나)”

7행까지는 혜소국사가 꿈결에 불러준 대로 쓰고 마지막 8행 7자를 창작해 채운 3수생 박문수는 마침내 이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박문수의 ‘몽중 등과시(夢中 登科詩) 낙조(落照)’다. 그의 뛰어난 서정성이 심사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런데 최근 이 마지막 7자 중 6번째 글자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었다. 고령 박(朴)씨 대종회에서는 ‘(대나무)피리 적(笛)’ 자로 알고 있었으나 향토사학자 윤민용(77) 동안성노인대학 학장은 정신문화원 등에서 자료를 찾아 ‘풀피리 적(苖)’자라고 주장해 대종회측과 심한 격론이 있었다. 결국 윤 학장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대종회에서도 수용, 대나무피리가 아닌 풀피리로 바로 잡히면서 새롭게 해석되게 됐다.

혜소국사와 일곱 나한에 바친 박문수의 찹쌀유과는 오늘날 수험생들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을 주는 유래가 됐다. 

혜소국사와 선인으로 교화돼 제자가 된 산적 7인의 나한이 모셔진 나한전

박문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 절은 대입시를 앞둔 수험생 부모들 사이에 ‘수험 기도사찰’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영험하기로 유명한 절로 입소문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각종 고시생 등 시험을 앞둔 사람들도 각지에서 찾아온다고 한다.

눈이 소복히 쌓인 1월 첫 주말, 나는 산사의 눈바람을 뚫고 나한전 앞에 섰다.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이곳 나한전에서 펼쳐져 있었다. 예배객이 몰려 유과로 시작한 ‘제물’이 지금은 초코파이와 각종 사탕까지 앞에 두고 불공드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어사 박문수를 있게 한 사찰에 ‘박문수의 꿈’을 이어가 주길 수험생 부모들은 애타게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칠장사를 십여년간 집중 연구해온 윤 학장님은 “꾸준히 기도했더니 큰외손녀가 지난해 서울대 갔다”며 기자에게도 기도를 권하신다. 신자는 아니지만 함께 기도 후 칠장사에 대한 많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얽힌 얘기들을 들었다.


칠장사의 여러 풍경들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1400년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폐사 단계에 있던 고려 현종 5년(1014년)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왕명을 받고 크게 중창했다. 혜소국사가 처음 왔을 때 7명의 산적이 얼씬거렸는데 이곳 우물의 바가지를 이용해 이들을 현인으로 교화시켜 제자로 만들었다.

그후 나한전에는 혜소국사와 이들 7인의 현인을 모셔오고 있는데 이는 세계 불교 역사상 우리나라 사람이 부처와 나한으로 모셔진 유일한 절이 됐다. 이 나한전에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나한전이 생긴 이래 900여년간 계속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뒷산 이름도 아미산에서 7명의 현인을 뜻하는 칠현산으로 바뀌었다. 조선 숙종 20년에는 한 세도가가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됐다가 10년 후 대웅전을 중창했다.

칠장사는 인목대비의 눈물겨운 친필 칠언시(七言詩)로도 유명하다. 보물 제 1627호다.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였으나 서출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위패를 칠장사로 모셔와 크게 제를 올리고 궁궐로 돌아간 후 10년간 마음을 달래며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베껴 쓴다. 이 글들은 칠장사 극락전 벽에 붙여 보관하고 있다. 필체가 약간 남성적인 듯 한 힘이 넘치고 또한 수려했다.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유배가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 복원되자 인목대비는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한 원찰(願刹)로 삼아 크게 중수했다. 또 직접 쓴 칠언시를 주지스님에게 내렸는데 지금까지 380년간 이곳에 보관해오고 있다.

“老牛用力已多年 / 領破皮穿只愛眠 / 犁耙已休春雨足 / 主人何苦又加鞭” (“노우용역이다년 / 영파피천지애면 / 여파이휴춘우족 / 주인하고우가편”)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이미 여러해 / 목은 찢기고 길마는 뚫려 잠만 자고 싶어하네 / 밭갈이는 이미 끝나고 봄비는 충분히 오는데 / 주인은 어이하여 괴로워하며 또 채찍을 드는가”

인목대비가 직접 쓴 글씨들. 왼쪽 작은 사진은 칠언시로 보물 제1627로 지정돼 있다.

칠장사에 얽힌 얘기들을 설명해주신 윤민용 학장

윤 학장님은 찬찬히 시를 설명해주셨다. 이 시는 명나라 세종황제의 신하 장면이가 지은 것을 인목대비가 제 4행의 4번째와 5번째 글자를 원래 용(用)과 고(苦)에서 고(苦)와 우(又)자로 바꿔서 쓴 시라고 한다. 이 원본 글은 주지스님과 윤 학장님 딱 두분만 열쇠를 갖고계시는데 나는 운이 좋았다.

윤 학장님은 하나라도 더 설명해주실려고 부지런하게 오가시며 안내하신다. 몹시 추운 날씨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런 기회에 향토사학자께 안들으면 언제 듣겠나 싶어 에이는 듯한 칼날 추위를 견뎌냈다. 아담한 경내를 두루 돌며 오불회괘불탱과 혜소국사비에 대해 상세한 설명도 놓치지 않으셨다.

이 절에는 또다른 역사적 거인 두 명이 더 등장한다. 신라 왕실에서 태어나 버림받은 궁예가 어린시절을 여기서 숨어지내며 활을 배웠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윤 학장님은 궁예가 열살까지 여기서 지내다 그 때 강원도 세달사로 간 것을 끝으로 그의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열살에 세달사로 들어가는 것부터 다뤄지고 있어 야사와 정사의 맥을 따라가면 이곳에서의 생활이 신빙성 있다고 한다.

또 한명의 인물은 의적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1558~1562년 황해도에서 도적질을 할 때 스승 병해대사의 부름을 받고 칠장사를 방문했다. 병해대사는 임꺽정에게 “이곳 일곱 나한도 도적이 선인으로 변해 모셔졌는데 너도 부처님 뜻을 받들고 살아라”고 청하자 임꺽정은 이후 도적질은 하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이 되기로 결심하고 실천한 계기가 됐다. 그도 교화된 셈이다. 그리고 자신도 일곱두목이 되겠노라며 후에 다시 두목들과 찾았으나 대사는 입적한 직후였다. 크게 슬퍼한 임꺽정은 평소 대사의 뜻을 받들어 1560년 이곳 극락전에 ‘꺽정불’을 모셔 지금까지 전해오고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옆을 지나던 보살님께서 여기서 식사하고 가라고 권하신다. 식당에 내려갔는데 주지 지강스님과 조우했다. 물론 초면이지만 간단히 인사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밥을 먹어봤다. 

절에서 내려오는 길에 돔 처럼 생긴 아름다운 찻집이 길가에 자리하고 있어 들러봤다. '남이카페'라는 동그란 집 안에 분위기도 고즈넉한게 좋았다. 산사에서 얼어붙은 몸을 벽난로 앞에 앉아 따뜻한 차 한잔에 녹이고 나니 제법 유쾌했다. 여사장님께서 벽난로에 굽고 있던 고구마 하나를 건넨다. 멋진 여행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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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특별한 칠장사 나한전: 칠장사의 나한전은 아주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나한전은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를 모신 16나한전이지만 이곳은 혜소국사와 선인으로 교화된 7인의 산적을 나한전에 모셨다. 당시 혜소국사는 부처님으로 상징됐을 만큼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산적 출신이 나한전에 모셔진 것은 세도가나 양반들이 아닌 평민 및 종들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덕망있는 유생인 선비 등 권세가들은 나한전에 기도하기를 거부해왔는데 박문수는 그 틀을 깬 것이다. 

또 나한전을 모시는 법당이 너무 협소해 지금은 예배객을 위해 임시건물 식으로 꾸며놓았다. 

나한전 바로 뒤의 멋진 소나무는 꼭 관심있게 보자. 올해 650살 된 나옹송(懶翁松)이다. 이곳 보살님 설명으로는 소나무 가지와 잎이 여인의 치맛자락 같다고 했는데 정말 치마를 펼쳐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나한전에 기대듯 비스듬히 누워서 자라고 있다. 나옹송의 높이는 약 8m, 둘레는 2.1m로 나무 아래에 서면 보살님 말처럼 마치 여자의 치마 폭을 펼친 듯한 모습인데 그 아래 서면 비도 안맞을 것 같다. 나옹 스님(1320~1376년)이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나옹 스님은 고려말 왕사(王師)로 본 이름은 원혜(元慧)다. 
 

혜소국사비

■ 혜소국사비: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3년(972년) 안성에서 출생해 10세에 입산했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고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대사는 원래 정연대사로 불렸다.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83세이던 고려 문종 8년(1054년) 입적했다. 문종이 크게 슬퍼하여 왕사였던 정연대사를 왕 보다 높은 칭호 국사(國師)라 칭하고 이름을 혜소라 해서 혜소국사가 됐다.

문종은 1060년 중국에서 비석 돌을 들여와 추모해서 세운 것으로 글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는데 워낙 귀한 돌이라 작은 글씨들이 매우 선명하게 유지되고 있다. 높이 241cm, 폭 128cm, 양 옆으로는 쌍용이 새겨져 있는데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는 평이다.

1694년 한 세도가에 의해 두동강이 나 방치돼오던 것을 1976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국 문화재 관리 지시로 부서진 비석을 붙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칠장사엔 무엇이 있나: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로 국보 제 296호 오불회괘불탱과 보물 제 1256호 삼불회괘불탱 그리고 혜소국사비, 인목대비 필체 칠언시 등이 유명하다. 또 폐찰이 된 봉업사 석불입상이 이곳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으며 수많은 부도가 눈길을 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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