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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만들면 불편함도 사랑하게 된다
부민혁 · 이수현 · 김희봉 삼성전자 디자이너 3인방…글로벌 시장 흔드는 가전 디자인의 힘은 어디서…
이건희회장 해외출장 다녀오면
디자인 임원부터 찾아

깐깐하기로 유명한 日디자인진흥회
냉장고 포장지까지 상 줘

뭘 담을까보다 뭘 덜어낼지가 어려워
사각틀만 보면 TV 떠올리는 직업병도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품질은 세계 수준인데 디자인은 아직 많이 부족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지난 몇 년간 첨단 가전제품을 사보지 않았거나 혹은 디자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세계에서 가전제품을 가장 많이 파는 회사’인 삼성전자의 디자이너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민혁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디자인그룹 수석 디자이너는 ‘까칠한’ 질문에 망설임없이 답변을 내놓는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디자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리 내부에서 검토되거나 (시제품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이 전부 양산화된다면 세계 어떤 기업도 이길 수 있다. 속된 표현으로 어떤 회사 제품들에도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균형을 잡는 것이다. 단순한 디자인적 가치로만 세계 톱(TOP)이 되는 게 눈앞의 목표가 아니니까.(웃음)”

첨단기술과 독보적인 품질관리에 가려져 있지만 ‘디자인’은 삼성전자의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디자인 임원들부터 찾는 이건희 회장의 ‘열성’ 덕분인지, 삼성전자의 디자인은 지난 몇 년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판매량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유수의 산업 디자인 전시회에서 상을 상당수 휩쓸고 있다.

지난 11월 일본 디자인진흥회의 ‘굿 디자인 어워드 2012(Good Design Award 2012)’에서는 삼성의 OLED TV ‘ES9500’과 함께 냉장고 포장 패키지 등 총 2점이 금상을 수상했다. ‘굿 디자인 어워드’는 미국의 ‘IDEA’, 독일의 ‘iF Product Design Award’와 함께 산업 디자인 분야의 ‘세계 3대 디자인 상’으로 꼽힌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일본 디자인진흥회가 자국산 TV들을 모두 제쳐두고 삼성 제품에 상을 준 점이나, 제품도 아닌 ‘냉장고 포장지’에까지 상을 준 것을 보면 그만큼 삼성전자의 디자인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ES9000 제품 디자인에 실제로 사용됐던 디자이너의 스케치. 아래 사진은 위로부터 부민혁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수석 디자이너, 이수현 생활가전사업부 책임 디자이너, 김희봉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책임 디자이너.                                                                                   [사진제공=삼성전자]

지난 여름 등장한 대형 프리미엄 냉장고 T9000도 삼성전자의 디자인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품.

세계 최초로 900ℓ의 벽을 깨면서도 드물게 스테인리스 메탈 소재를 냉장고 전면에 채용했다. 메탈 소재가 가진 업소용’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했다. 냉장고 정면에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낸 ‘컨투어 디자인’, 스테인리스 표면에 홈을 파 넣는 판화술인 ‘인그레이빙 기법’ 등을 완벽하게 적용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공이 들어갔다.

“디자인의 공감대를 이루는 데만 3년이 걸렸어요. 스테인리스 메탈은 특유의 기품이나 단열성, 위생감 등에서 매력적인 소재지만 내부적으로도 업소용이라는 이견이 있었죠. 전에 없던 것을 만들겠다는데 누구도 확답을 해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을 설득하고, 디자인을 계속 다듬어가야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죠. 결과적으로 외형이나 기법적인 측면에서 3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델이 나왔습니다.”(부 수석 디자이너)

“특히 냉장고는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제품이에요. 외형에서 심미적 차별성을 유지하면서도 냉기 순환 같은 기술부문이나 사용성 등의 측면을 고민해야 합니다. 내부에 용기들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만 따져도 내부 디자인이 수백가지 패턴이 나오니까요. T9000은 그만큼 총체적 고민이 많이 담긴 제품입니다.”(이수현 생활가전 책임 디자이너)

고민은 성과로 이어졌다. 제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디자인이라는 평을 받았고 30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출시 1달 만에 1만대가 팔리는 인기도 얻었다. 출시가 안된 해외의 지역에서 제품을 사고 싶다는 소비자들의 반응이 이어진다.

삼성전자의 제품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고 고된 일이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리딩컴퍼니가 된 후 디자이너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 남들이 해보지 않은 디자인을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보는 눈도 많아졌다. 제품이 등장하면 전 세계 모든 디자이너들의 이목이 쏠린다. 그렇다 보니 제품 하나가 디자인되는 데도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 사이에 수천에서 수만장의 디자인 시안이 그려진다. 기술적인 문제와 심미안적 측면을 놓고 디자이너들과 엔지니어들이 서로 고집을 피울 때도 있다. 냉장고 내부를 고민하던 남자디자이너에게 식기 수집이라는 새 취미가 생기거나, 사각 틀만 보면 TV부터 떠오르는 직업병 디자이너들도 생긴다는 귀띔이다.

“한창 작업할 때는 주말에도 집에 못 들어갈 때도 많다. 회사에서 밤도 많이 새운다. 불편하지는 않다. 회사 내에 편하게 샤워할 수 있는 시설에 깨끗한 수건도 세팅돼 있어서 어떨 땐 집보다 회사가 더 좋아보일 때도 있다.(웃음)” (부 수석 디자이너)

삼성전자가 내세우고 있는 제품 디자인의 기본 콘셉트는 ‘타임리스 디자인’이다. 단어 그대로 시간이 흘러도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디자인이다.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넘치고, 생활에 녹아들면서도 정체성이 명확한 디자인. ‘가격으로 주목받으면 3류, 가치로 주목받으면 2류, 가슴으로 주목받으면 1류’라는 전자업계 마케팅의 정점에 선 디자인이다.

“뭘 담을 것인가 못지않게 뭘 덜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어렵다. 한 번 가까이 두 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아끼며 쓸 수 있는 디자인. 라이카 카메라처럼 불편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디자인을 그려내는 게 쉽지 않다.”(이 책임디자이너)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향한다는 건 그만큼 삼성전자라는 조직의 심미안과 전체적인 디자인 지능이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디자인에 대한 회사의 이해도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지금은 다르다. 당장에 최고경영진들이 요구하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다. 요구하시는 부분이 점점 늘어난다. 이전에는 디자인이라고 하면 외형적인 것만 이야기했지만, 지금 임원들은 정말 심미적인 부분까지 요구한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지적하는 경우도 꽤 있는데 맞는 지적이라 속으로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다.(웃음)”

디자이너들을 대하는 면도 달라졌다.

“어느 땐가부터 맹수를 맹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할까.(웃음) 디자이너들은 맹수다. 맹수들로부터 야생성을 뺏으면 일하기 힘들다. 처음 입사해서 출장 다닐 때는 현지법인에서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때문에 “왜 그 모양이냐고 혼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 (파마머리에 목도리를 한) 이런 차림으로 사장님들께 보고하러 가기도 한다. 그만큼 조직이 변한 거다.” (부 수석 디자이너) 

홍승완 기자/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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