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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설&파고다’ 멈췄던 헤비메탈 물줄기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16일 오후 4시 30분, 서울 홍대 롤링홀 앞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발길로 부산했다. 다소 연륜이 드러나는 얼굴들에선 상기된 표정이 엿보였다. 홍대 인근 공연장에선 보기 힘든 나이 지긋한 ‘아저씨’의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날 롤링홀 앞의 풍경은 젊은 여성들이 많은 홍대 인근 일반적인 공연장 앞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롤링홀 바깥으로 공연을 준비 중인 밴드의 리허설 소리가 새나왔다. 헤비메탈 밴드 크래쉬(Crash)의 6집 ‘더 파라곤 오브 애니멀스(The Paragon of Animals)’ 수록곡 ‘크래쉬데이(Crashday)’였다. 내년에 데뷔 앨범 발표 20주년을 맞는 한국 헤비메탈의 대들보 크래쉬도 이날 공연에 출연하는 9개의 밴드 중 막내뻘이다. 이날 무대에 오를 밴드들은 크래쉬보다도 공연을 기다리는 ‘아저씨’들 보다도 더 오래된 전설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 공연 ‘헬라이드 라이드온 1216 송설&파고다(이하 송설&파고다)’가 시작됐다. 이날 공연엔 80년대 한국 록과 헤비메탈의 성지였던 공연장 송설과 파고다에서 활동했던 대표 밴드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열띤 무대를 선보였다. ‘막내’ 크래쉬가 첫 무대를 열었다. 밴드의 프론트맨 안흥찬은 “송설과 파고다에서 오늘 무대에 오를 선배들의 공연을 보며 꿈을 키웠다”며 “우린 송설과 파고다에서 공연을 펼쳤던 마지막 세대다. 이렇게 선배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게 돼 너무나도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크래쉬는 ‘마이 워스트 에네미(My Worst Enemy)’, ‘스모크 온 더 워터(Smoke on The Water)’ 등으로 강렬한 무대를 꾸민 뒤 다음무대를 나티(Naty)에게 넘겼다. 1986년에 결성돼 한국 스래쉬 메탈의 초석을 닦았던 나티(Naty)가 크래쉬의 강렬한 여운을 이어갔다. 나티의 초대 보컬이었던 정형섭도 스탠딩 객석에서 공연을 지켜보며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무대를 꾸민 모비딕(Mobydick)은 달아오른 분위기에 잠시 쉼표를 더했다. 80년대 후반 한국 최초의 바로크메탈 밴드 디오니소스와 스트레이저, 프라즈마 등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이시영의 기량은 과장 없이 여전했다. 실용음악을 강의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시영은 객석에 모인 젊은 제자들과 어린 두 아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공연했다. 무대 앞 쪽 객석에선 중년의 관객 하나가 자신의 지인에게 장성한 아들을 소개하며 함께 공연을 즐기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생활처럼 록을 즐기는 외국에서나 볼법한 모습이 대단히 이채로웠다.

이어 H2O가 무대에 올랐다. 80년대 중반 시나위, 백두산, 부활과 함께 한국 헤비메탈 붐을 이끌다 90년대 초반 한국 최초로 모던록을 선보였던 이들의 무대에 관객들은 ‘떼창’으로 화답했다. 3집 수록곡 ‘오늘 나는’으로 무대를 시작한 H2O는 비틀스의 ‘컴 투게더(Come Together)’, 데뷔 앨범 수록곡 ‘안개도시’ 등으로 객석과 호흡했다. 전성기 당시 화려한 무대매너와 스타일리쉬한 패션을 과시했던 보컬 김준원의 감각은 지천명의 나이에도 죽지 않았다. 선글라스에 스키니진, 체크무늬로 코디한 김준원의 무대 위 모습은 충분히 섹시했다. 여기에 시나위, 카리스마, 아시아나, 자유 등에서 한국 록음악사에 획은 그은 각종 ‘슈퍼밴드’에서 명성을 날렸던 베이시스트 김영진과 기타리스트 토미 킴의 연주도 발군이었다.


H2O의 공연 이후 라디오 DJ계 ‘살아있는 전설’ 김광한 씨가 특별한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김 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음악을 접했던 관객들은 무대에 오른 밴드 이상으로 김광한의 등장에 환호했다. 김 씨는 “최근 평생 동안 잡아온 마이크를 놓고 여러 공연을 다니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며 “음악을 하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이들을 평가해줄 매체가 모두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여기 모인 관객들이 많은 응원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엑스타시(Extasy)는 나이 든 관객 사이에 끼인 젊은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90년대 중반 그룹 걸(Girl)로 활동하며 ‘아스피린’, 이브(Eve)로 활동하며 ‘너 그럴 때면’ 등의 히트곡으로 가요계에서도 활약했던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밴드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자신들의 히트곡 대신 엑스타시로 활동하며 선보인 곡들로 무대를 채웠다. 


공연 후반부는 반가운 얼굴들의 연속이었다. 한국에 본격적인 LA메탈을 선보였던 크라티아(Cratia)가 23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와 ‘하드 헤디드 우먼(Hard Headed Woman)’ 등 히트곡을 재현했다. 원년 멤버인 보컬 최민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조지 린치(George Lynch)란 찬사를 들었던 이준일의 기타 연주는 여전히 화려했다. 공백인 보컬은 라디오데이즈의 김용훈과 엑스타시의 김세헌, 원(WON)의 손창현이 객원 멤버로 나서 다채로운 콜래보레이션 무대로 채웠다. 여기에 가수 홍경민이 객원 보컬로 깜짝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홍경민은 “크라티아가 23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한다”며 “새 앨범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니 많은 성원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제로지(Zero-G)도 21년 만에 돌아왔다. 보컬 김병삼의 스크리밍 보컬은 다소 불어난 몸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웠다. 제로지는 데뷔 앨범 수록곡 ‘익사이팅 게임(Exting Game)’으로 객석을 흥분시킨 뒤 쉼 없이 그 열기를 이어나갔다. 오래전 장비의 부족과 열악한 녹음 환경 때문에 모기 울음소리처럼 애처로운 사운드를 들려줬던 왕년의 히트곡들은 라이브 무대에서 파워풀하게 되살아났다. 긴 공연 시간에 다소 지쳐있던 오래된 팬들은 제로지의 무대에 다시 기력을 차린 듯 열광했다. 제로지는 앙코르 무대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무대 뒤로 물러갈 수 있었다.


마지막 무대는 ‘무관의 제왕’ 블랙신드롬(Black Syndrome)이었다. 블랙신드롬은 1987년 결성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인 해체 없이 꾸준하게 활동해 온 ‘현재진행형’ 밴드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블랙홀과 더불어 몇 안 되는 사례다. 9집 ‘나인스 게이트(9th Gate)’ 수록곡 ‘맨 언더 더 문(Man Under The Moon)’으로 무대를 연 블랙신드롬은 자신들의 최고 히트곡이자 3집 ‘온 더 블루 스트리트(On The Blue Street)’의 수록곡 ‘피드 더 파워 케이블 인투 미(Feed The Power Cable Into Me)’와 2집 수록곡 ‘시크릿 러브(Secret Love)’로 오랜 시간 스탠딩 객석에서 지친 관객들의 헤드뱅잉을 유도했다.

공연은 무려 5시간 만에 끝났다. 이날 공연의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밴드들은 모두 한국 헤비메탈 1세대와 2세대에 획을 그었던 ‘전설’들이었다. 이들이 한데 모여 활동 재개를 선언한 이날 공연은 현재 헤비메탈 음악의 인기와는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언론은 많지 않았다. 티켓가 역시 일반 공연과 비교해서 헐값인 3만 5000원(예매가 2만 8000원)에 불과했다. “음악적 다양성을 위해 오늘 무대에 오른 밴드들이 다시 활발히 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김광한 씨의 목소리의 울림이 깊다. 참으로 반갑고도 많은 고민을 남긴 공연이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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