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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항·실험의 비엔날레…그것은 전시회가 아니다
2014년 되면 벌써 제10회…광주비엔날레 아시아 정상으로 키워낸 ‘비엔날레 PD’ 이용우
신문기자·평론가·교수·큐레이터 거쳐
예술분야 안목 후천적 DNA로 얻어

광주 5·18에서 오늘날까지
시민의식 발전과 예술의 혼합적 맥락
10회 비엔날레는 그 담론의 ‘플랫폼’
미술관 늘어나듯 생겨난 비엔날레들
곧 필요한 만큼 재편돼야





신문기자에서 출발해 평론가, 교수, 큐레이터를 거쳐 지금은 광주비엔날레를 이끄는 문화CEO인 이용우(64) (재)광주비엔날레 대표는 ‘국내 1호 비엔날레PD’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김동호가 있다면, 광주비엔날레에는 이용우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비엔날레’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20년 전에 광주비엔날레를 기획해 지금의 광주비엔날레를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정상의 비엔날레로 키워낸 주역이다. 광주 이후 전국의 지자체가 비엔날레를 잇달아 만들며 국내에 비엔날레가 성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로부터 진정한 비엔날레 문화란 무엇인지, 비엔날레PD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봤다.

-당신을 ‘비엔날레 PD(Producer)’로 부르고 싶다. 그 타이틀을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외국의 어느 미술관장이 나를 ‘비엔날레맨(biennale man)’이라고 부르더라. ‘비엔날레맨’이든, ‘비엔날레PD’이든 비엔날레와 사랑에 빠져 동거 중이라는 말로 들려 나쁘지 않다. 부산영화제의 김동호 전 위원장이 ‘영화맨’이라는 말이 듣기 좋다고 내게 그러더라. 일부종사에 대한 미덕처럼 들린다.

-일간신문 문화부 기자로 처음 미술에 입문한 것으로 아는데, 여러 직업을 거쳐 문화CEO가 됐다.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전문성을 갖춘 비엔날레 인력이 태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1호 비엔날레PD’‘ 비엔날레맨’으로 불리는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대표. 인력양성을 위해 국제 큐레이터 코스도 만든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하길 바라고 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한국의 산업화 및 민주화, 그리고 오늘의 디지털 시대를 관통해온 사람이 모두 겪은 격동의 시간에 나도 포함될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언론인으로 출발해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교수, 비엔날레 예술총감독, 비엔날레 대표 등을 거치면서 숨가쁜 인생 전환을 이뤘다. 한우물을 판 사람에 비하면 ‘바람난’ 사람이다. 절반은 한국에, 나머지 반은 국제사회에 나 자신을 송두리째 내놓고 경쟁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연계되긴 하지만 어떤 일이 가장 적성에 맞았나.

▶시각문화 현장의 글쟁이나 비평가로서의 나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시각문화는 연구 영역이 매우 넓고, 인문학ㆍ사회학을 통합해 담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좁은 용어로는 이제 더는 시각문화 현장을 설명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성장 과정은 어땠나?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길러진 건가?

▶나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문화니 예술이니 오늘날 내가 종사하는 분야는 전적으로 후천적 DNA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눈 녹은 가랑잎 밑에서 곤충이 나오는 것은 그 속에 곤충 발생을 위한 유기물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시를 썼고, 언론사 시절 미술이론을 전공했으며,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내게 약간의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독서와 글쓰기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슬하의 세 자녀가 모두 국제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늘 국제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자녀들에겐 어떤 아버지인가?

▶큰딸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교수로 디지털미디어를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술가가 된 셈이다. 둘째는 한국의 모 교육재단에서 국제관계 일을 하고 있으며, 셋째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구직 중이다. 아버지의 직업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직장을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불평이다. 나는 내 자식들의 조언자이자, 친구로 매우 즐겁다.

-광주비엔날레가 탄생한 이래 한국에서도 비엔날레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미술제인 비엔날레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까닭은? 그리고 일회성이 아닌 전문인력 확충과 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는 데 그 이유는?

▶한국에서 비엔날레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서 심경이 좀 복잡하다. 국내에만 벌써 10개의 비엔날레가 있다. 대중성이 별로 없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비엔날레가 그토록 많아진 것은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1995년 첫 해에 163만명의 관객이 들었고, 국제사회 평도 좋았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늘듯 비엔날레도 늘고 있으나 곧 필요한 만큼 재편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비엔날레는 미술관처럼 되어선 안 된다. 그 아름다운 저항 정신, 실험 정신을 상실해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올 들어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로 재선임됐다. 비엔날레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나?

▶광주비엔날레의 나름 성공 요인은 개방성이다. 인종이나 국적ㆍ종교ㆍ사상 등 어떤 이유에서도 제약을 두지 않고 있다. 나보다 훨씬 더 비엔날레를 발전시킬 수 있는 분들이 많지만, 나는 비엔날레의 국제적 도약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비엔날레에 학문적 배경을 더하려 힘쓰고 있다. ‘눈’이라는 현대미술비평 저널을 발간 중이며, 국제 큐레이터 코스를 만들어 4년째 운영 중이다.

-광주비엔날레가 20년을 바라보니 난관도 많았겠다.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가장 어렵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비엔날레를 어떻게 시민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맥락으로 치환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비엔날레가 단순히 미술전시회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비엔날레는 담론의 플랫폼이고, 문화가 다양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쟁의의 장소’다. 비엔날레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은 천차만별이고, 대부분 비전문가들이다. 그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2014년이면 광주비엔날레가 창설 20주년을 맞고 10회 전시가 치러진다. 중요한 분기점이 될 텐데.

▶광주비엔날레는 전 세계 비엔날레 중 유일하게 창설문을 갖고 있다. ‘광주의 시민정신’이라는 창설문이다. 그러므로 20주년 전시를 기획할 감독에게 광주의 5ㆍ18에서 오늘날까지 시민사회 의식의 발전과 예술과의 혼합적 맥락의 검증을 제안해보려 한다.

-제1회 세계비엔날레대회가 지난 10월 광주에서 열렸다. 세계대회가 갖는 의의는?

▶비엔날레 생산자들이 한군데에 모여 공통의 고민을 논의해보는 비엔날레 반성의 자리였다. 또 비엔날레 간 정보 교환이나 철저한 연구를 위한, 가칭 ‘국제비엔날레협의회’ 설립 등의 의제가 논의됐다.

-국제적인 인맥은 어떻게 넓혔나?

▶우물 파는 사람들한테 들으니 지하로 100m쯤 파내려 가면 영양분이 풍부한 큰 수맥을 만난다고 하더라.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100m를 파고들어 가겠는가. 다만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언젠간 만나진다고 믿는다.

-현대미술계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비엔날레PD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생각을 크게 하고, 죽도록 공부하며, 의식의 제한 없이 덜 호사스럽게 살 자신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자유롭게 뻗어가는 다양한 백남준’이 우리 사회에 더 나왔으면 좋겠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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