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출판문화사를 맨 앞에서 써온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이달 말 팔순을 맞아 자서전 ‘책’을 냈다. 제목 자체가 가볍지 않다. 50년 남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을 냈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을 단 책은 처음이다.
그는 지난 11일 출간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출판은 인생에서 최상의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 때부터 세련된 책에 대한 갈증이 컸다. 허접스러운 책 모양새를 바꾸고 싶었다. 당시엔 일본 책을 모방한 게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책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민음사가 걸어온 책 디자인 혁신의 과정에서 확인된다.
출판의 꿈을 부채질한 것은 무엇보다 좋은 작품이 주는 강렬한 쾌감이었다. 그는 늘 그런 소설을, 작가를 발굴하고 싶었다고 한다.
1966년 5월 19일 서울 청진동 옥탑방에 사무실을 내고 친구의 권유로 첫 책 ‘요가’를 냈다. 예상과 달리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는 ‘이렇게 하면 되는가’ 싶었다. 두 번째 책인 유주현의 ‘장미부인’과 잇달아 낸 책들은 고배를 마셨다. 3000만원의 빚이 남았다. 약국을 경영하는 아내가 1원짜리 활명수를 팔아 댄 돈으론 어림이 없었다. 빚에 허덕대고 있던 때 그는 주위의 권유로 일본 책 리프린트 ‘건축설계 자료 집성’을 낸다. 불법 복제인 셈인데 외판원을 조직, 성공하면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는 1976년 국제출판협회 총회 참석차 처음 일본을 찾았을 때 자신이 리프린트한 본래 출판사 쪽으로는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고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빚을 청산하자마자 그는 이후 외판 조직을 접고 문학 출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첫 기획은 바로 ‘세계시인선’. 당시 일본판의 중역에서 벗어나 원문과 번역을 동시에 싣는, 제대로 된 번역시집이었다. 이는 큰 호응을 얻었고 이에 고무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내게 된다. 시집 또한 돌풍을 일으켰다.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 3만부가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자비 출판이 대부분이었던 시집도 기획 출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출판계가 좌우 진영으로 갈리게 된 1980년대 상황에 대한 그의 줏대 있는 발언도 주목을 끈다.
“그 시절 엄혹한 체제에 맞서는 데 문학이 기여했던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1980년대의 험한 지형을 통과하면서 눈앞의 현안보다는 총체적인 깊이와 넓이로 튼실한 꽃을 화려하게 피워내던 한국 문학이 본 모습을 잃은 채, 많이 변질되고 훼손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출판을 해오는 내내 보수와 진보 사이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철저하게 중도를 지켜온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본문 중)
1985년 수요회를 조직, ‘출판인 17인 선언’으로 당국에 밉보이며 그는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빨갱이로 낙인찍혀 특별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추징세액은 1억원. 매출이 5억원인 때였다.
책에는 평생 헤어져 사신 부모님의 이야기, 재물을 모으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권력 의지도 강했던 아버지의 그늘과 불신, 상처, 서울대 문리대 시절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자유풍속’이 일등으로 당선됐지만 소설의 시국 풍자적 성격 때문에 뽑히지 못한 사연 등도 들어 있다. 고은 시인을 비롯해 그와 교유한 수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오르내리지만 보폭은 신중하다.
좋은 책에 대한 갈증과 애정, 출판 현장에서의 열린 사고, 디지털 시대의 책의 모습까지 읽어내려가면 왜 책 제목이 ‘책’인지 드러난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박맹호 회장이 아니라 책이다. 그는 평생 책에 헌신했다.
/meelee@heraldcorp.comㆍ사진=이상섭 기자/babt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