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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 패스드푸드 사이즈가 점점 커지는 이유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140자 트위터로 세계가 소통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아날로그 스타일이 있다. 평균 20자 안팎의 범퍼스티커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 당시 ‘희망과 변화(Hope and Change)’라는 함축적인 슬로건을 범퍼스티커로 제작,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당선에 트위터만큼이나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미국에서는 범퍼스티커가 정치적 의사표현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폭넓게 활용된다.

생활 속에서 철학하기로 유명한 세계적 철학자이자 스탠퍼드대 교수인 잭 보웬의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민음인)는 위트있는 스티커가 주는 재미와 반전의 즐거움과 함께 짧은 글귀에서 건져내는 무궁한 의미망에 놀라게 된다. 

보웬은 환경ㆍ전쟁ㆍ복지ㆍ인간복제ㆍ사형ㆍ안락사ㆍ낙태 등 사회적 이슈는 물론 개인적 취향과 종교적 신념, 윤리 문제와 라이프스타일, 말장난에 이르기까지 한 줄의 범퍼스티커를 통해 날카로운 인문학적ㆍ과학적 사유를 풀어낸다.

가령, ‘사이즈는 중요해(SIZE DOES MATTER)’라는 범퍼스티커는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등 패스트푸드점에서 벌이는 사이즈 경쟁에서 시작한다. 10년 전 ‘라지’ 사이즈는 지금 ‘스몰’로, 패스트푸드사는 저마다 더블더블 사이즈를 외친다. 우리의 위도 그만큼 커졌을까. 보웬은 크기와 공간, 상대성에 대한 과학자의 논의를 소개하며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의 ‘쾌락의 쳇바퀴’에 갇힌 현대인의 일상까지 그려보인다. 이스털린은 1978년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상품이 적혀있는 목록에서 ‘갖고 싶은 것’과 ‘현재 가진 것’을 선택하라고 지시한다. 16년 후 같은 참가자에게 같은 목록을 주며 다시 선택하게 했다. 그러자 참가자 거의 전원이 과거에 갖고 싶은 것으로 선택했던 물건을 현재 보유했으며, 첫 설문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선택한 물건을 현재 갖고 싶은 것으로 표시했다. 욕망은 행복에 그닥 기여하지 못한다.

흔히 발견되는 ‘아기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는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의 표현이지만, 그 내면에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인간심리가 깔려 있다. ‘그 무언가’를 해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고 해도 그렇다. 심리학자가 ‘행동 편향’이라 부르는 이런 경향은 불운이나 실패를 겪어도 “그래도 최소한 노력은 했잖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심리 기전이다.

이는 주식거래에도 해당한다. 주식을 팔지 않고 장기간 보유하고 있는 게 더 나을 때가 많은데 고객이 보기에 증권 브로커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만 그를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보인다. 고객 입장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라고 브로커에게 돈을 지급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되고 싶었던 꿈을 기억하라’는 말은 어떤가. 그 꿈과 지금 현실이 멀어져 있다면.

저자는 “지금의 당신이 꿈꾸던 ‘그 사람’이 못 되었지만 아직도 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앞으로 그 사람이 되어라”고 말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지금 모습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는가. 여기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사르트르까지 많은 철학자가 동조한다. 가령, 당신은 뒤따라 들어오는 낯선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배려 깊은 사람인가, 아니면 당신이 자상해서 문을 잡아주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첫 번째다. “우리의 반복적인 행동이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도 우리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정체성이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보웬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복제인간도 사람이다’ ‘안락사는 모순이다.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으니까’ 등 짧은 범퍼스티커는 충분히 생각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철학과 인문학ㆍ과학의 쉽지 않은 개념을 쉽게 풀어놓아 그야말로 ‘범퍼스티커는 천 마디 말을 대신한다(A STICKER’S WORTH 1000 WORDS)’.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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