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public enemy)
60·70년대엔 미-소 냉전시대 배경KGB출신들 세계정복 야심 다뤄
동구권 붕괴로 식상한 소재 전락
최근 개봉 23번째 ‘007’ 시리즈
국가에 버림받은 유능한 조직원
조직 상대로한 원한의 복수극
영화 ‘007’ 시리즈의 50년사는 제임스 본드의 역사이자, 악당의 역사였다. 그것은 곧 현실에선 서방 세계가 타깃으로 하는 ‘공적’ 혹은 악당의 드라마틱한 진화사이기도 했다. 1962년의 1편에 등장하는 악당 ‘닥터 줄리어스 노’는 원자핵 전공 과학자로,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미국과 소련에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결국 세계 정복을 꿈꾸는 테러조직 스펙터에 들어가게 된다. 2편 위기일발 편의 악당 ‘로자 클레브’는 소련의 첩보조직 스메르시 요원 출신으로, 역시 스펙터 멤버로 신분을 바꾼다. 스펙터의 두목으로 미국과 소련 영국 등을 상대로 하며 세계 정복의 야심을 펼치는 인물이 ‘어니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로, 007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3편과 4편의 악당은 금이나 돈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존재이며, 나토(NATO)와 대립각을 세우고 핵 공격 위협을 한다. 이후 지금까지 악당들은 미국의 암흑가 갱스터, 마약상, 아프가니스탄 왕자, 전직 소련 장교, 북한 엘리트, 무기거래상 등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소련 비밀경찰 KGB 출신이 가장 자주 등장하며, 대부분은 미국과 소련 간 제3차대전을 일으키려고 핵으로 위협한다. 세계 정복이나 인류 절멸이 그들의 목표다.
하지만 ‘적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첩보ㆍ액션영화의 철칙이다. 이제 화려한 시절은 갔다. 출생 배경이 됐던 냉전 체제는 무너진 지 오래고, 최근 몇 년간 세계의 깡패, 인류의 공적으로 주목받았던 소련 및 동유럽 비밀경찰의 잔당들, 중동의 테러조직, 이란과 이라크 북한의 핵개발도 관객에겐 식상할 대로 식상해졌다.
영화 ‘007: 스카이폴’은 조직과 불화하는 주인공을 내세우고 상처받은 개인을 악당으로 설정하는 최근 액션영화의 시류와 트렌드를 보여준다. |
가장 최근작인 25일 개봉한 시리즈 23번째 영화 ‘007: 스카이폴’은 서로를 닮아가는, 닮아가지 않을 수 없는 첩보영화, 히어로ㆍ액션영화의 숙명을 드러낸다. 숀 코네리,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머시 돌턴, 피어스 브로스넌을 잇는 제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총격과 함께 스크린이 피로 물드는 유명한 오프닝 타이틀 전, 5~10분간 차와 오토바이를 이용한 액션의 세례를 퍼붓는다.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시장통을 뚫으며 주택가의 지붕 위를 질주한다. 달리는 기차 지붕에서 적과 엉켜 싸우던 제임스 본드는 총에 맞아 벼랑으로 떨어진다. 영국 첩보기관 M16은 제임스 본드를 사망 처리하지만 간신히 살아난 주인공은 휴양지에서 은거하다가 본부가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직에 복귀한다. 작전 실패와 노쇠화로 인해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국장 M(주디 덴치 분)은 폭발 사건을 해결하고 비밀요원들의 명단 누출을 막고자 제임스 본드를 작전에 투입한다. M16을 궁지로 몰아넣은 일련의 사건 배후에는 전직 요원 실바(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있었다. 한때 M의 신임을 받았고 유능한 첩보요원이었던 실바는 조직의 배신에 원한을 품고 복수에 나선 것.
초반 카체이싱(도로 추격전)이나 위성 및 통신 네트워크, CCTV 등을 이용해 리얼타임으로 인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는 장면은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결정적으로 ‘007: 스카이폴’은 현대적인 악당을 투입해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맥락과 조우한다. 실바는 국가권력 혹은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개인이다. 복수와 증오에 사로잡혀 인성이 뒤틀리고 손상된 자아를 가진, 악마적 존재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나 베인과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실바뿐일까. 이번 편에서 제임스 본드는 피로감을 역력히 드러내고 심지어 체력 및 정신 감정을 재차 받는다. M16은 제임스 본드가 희생될 위험임에도 저격수로 하여금 총탄을 발사시킨다. 총격 한 방으로 간단히 제거되고,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007이다. 국장 M 또한 조직으로부터 ‘유효 기간 만료’ 판정을 받고 은퇴 직전에 놓인 인물. 돌이켜보면 ‘본’ 시리즈에서 제이슨 본은 CIA로부터 버림받고 제거 명령이 떨어져 도망치는 신세이고,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는 최근 편에서 존재 자체가 국가로부터 부정당한다.
‘007: 스카이폴’에서 잇따른 작전 실패와 정보 유출로 청문회에 불려간 국장 M의 대사는 현대 액션영화의 시류와 딜레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적은 국가도 아니고, 정치지도자도 아닙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제복도 입지 않은 개인입니다. 적의 존재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