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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려들듯한 커푸어의 심연..혼란에 빠진 현대인을 매혹하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지를.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전부인지를. 물론 과학적인 답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론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철학적인 답을 찾는 것이다. 내 작업도 그 일환이다”.

오늘날 세계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 중의 한명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58)가 서울에서 데뷔 30년을 중간결산하는 대규모 작품전을 열며 던진 말이다. 카푸어는 오는 25일부터 내년 1월27일까지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관장 홍라희)에서 개인전을 연다.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작가는 초기작인 Pigment 작품부터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보이드(Void)시리즈와 움직이는 설치작업인 ‘자동생성(Auto-generation)시리즈, 그리고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대형 금속조각까지 그간의 핵심작업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눠 선보인다. 특히 전시는 리움의 기획전시실은 물론 야외정원까지 폭넓게 활용돼 카푸어의 예술세계 전반을 음미할 수 있다. 총 전시작은 18점.

인도 뭄바이에서 인도인 아버지와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카푸어는 동서양 사상과 문화를 아우르며 ‘논리와 설명을 초월한 아름답고 명상적인 작업’을 선보여 갈채를 받아왔다.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조직위가 주는 상을 수상했고, 1991년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술상인 터너상(賞)을 수상한 그는 존재와 부재, 비움과 채움 등 이질적 요소를 융합시킨 시(詩)적인 작품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물질, 즉 물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물질 속에 존재하는 비물질적 요소를 탐구한다. 서양의 미니멀리스트들(도날드 저드처럼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는 현대미술가)이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라며 겉으로 드러난 최종의 것을 강조하는데 반해 카푸어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고 주창한다.

이를테면 인도인들이 힌두사원에서 의식에 사용하는 원색의 물감가루를 조각 위와 주변까지 뿌려 바닥과 작품간 경계가 모호한 작품을 선보이는 식이다. 착시를 일으키는 이 작품 외에도 근엄한 미술관 바닥에 실제로 둥근 구멍을 뚫은 ‘The Earth’ 라든가 미술관 한쪽 면 전체를 활용한 벽면작업 ‘Yellow’도 좋은 예다. 중심이 텅 빈 이들 작업은 오히려 그 비워진 구멍에서 ‘꽉 찬 채움’이 느껴지는 파격적이고도 역설적인 작품이다.


카푸어의 예술은 동서양,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지만 보다 보편적이고 신비로운 우주적 세계를 지향한다. 현실 저 너머 피안의 세계를 성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근원에 닿으려 하는 것. 따라서 그의 작품은 차분히 심호흡을 하고, 빈 마음으로 음미하는 게 좋다.

세개의 벽면을 넓게 차지한 대작 ‘무제’(1990)는 작품 안팎을 덮은 검푸른 분말안료가 빛을 흡수해 어두운 심연을 만들어낸다. 관람자들은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심연을 바라보며 “당신이 심연을 응시할 때, 심연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카푸어 만든 어둠의 무한공간은 숭고한(sublime) 아름다움, 즉 숭고미를 우리 앞에 드리우며 혼란에 빠진 마음을 씻어준다. 치유의 미술인 셈이다. 또 깊숙하고 어두운 빈 공간은 생명이 싹트는 어머니의 자궁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여성성이 읽혀진다는 지적에 동의하며 “나의 작업은 때때로 여성작가의 작업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런데 그같은 오해가 별로 싫지 않다. 창조와 에너지의 근원인 모성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붉은 녹으로 뒤덮인 15톤의 육중한 쇳덩이가 가느다란 수평막대에 얹어져 있는 작품 ‘동굴 Cave’(2012)은 불안정해 보이는 자태와 관람객을 빨아들일 듯한 거대한 구멍이 경이로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물성이 강한 작품임에도 미묘한 심리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 바로 카푸어 작품의 묘미이다.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블랙박스 중심에 설치된 카푸어의 붉은 왁스 작품 ‘나의 붉은 모국’ 또한 그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길고 커다란 해머가 시계바늘처럼 한시간에 한바퀴 회전하면서 둥근 회전판의 검붉은 왁스를 긁고 지나가면 그 궤적을 따라 작품의 형태가 서서히 변모한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치 제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듯 스스로 만들어지는 이 움직이는 조각은 카푸어의 자가 생성 시리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부모 자르듯 현실과 이상, 꿈과 현실을 분리해 생각하는 서구의 이원론을 뛰어넘어, 순환적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카푸어에겐 ‘반사’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의 근작들은 거개가 반사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거울처럼 눈부시게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그의 작업이념을 매우 잘 표현하는 재료다.

어지러울 정도로 빛을 반짝이는 대형 조각들은 (물리적으론 존재하지만) 관람객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은 반사된 이미지란 점이 흥미롭다. 작가는 야외정원에 놓인 오목하게 휜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사이를 관람객들이 거닐며, 금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이렇듯 카푸어는 어둠, 빈 공간, 강렬한 안료, 그리고 눈부신 반사를 통해 우리에게 환상적인 일루젼을 선사한다. 무한한 정신성과 영적인 의미로 채워진 그 공간은 곧 지극히 종교적이며 범우주론적인 세계다.

작품이 대단히 종교적이란 지적에 대해 카푸어는 “인생이란 신비롭고 혼란스럽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을 쫓다 보면 누구나 종교적이게 된다. 아티스트들 또한 모두 종교적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저 무엇을 드러내려 한 내 작업을 많은 이들이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관람료 일반 8000원, 초중고생 5000원. 사진제공 삼성미술관 리움. 02)2014-6900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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