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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김승조 항우연 원장…대입 2지망이 바꾼 우주인생
대학 2지망으로 선택한 항공공학과 합격 평생의 업으로…졸업후 미사일·발사체 연구에 매진 국내 항공우주공학 권위자에 올라

8~9년전 자체 발사체 기술 없었지만 러시아와 협력, 설계·운영기술 등 확보…다른 나라가 30~40년 걸릴 기술 한번에 습득

우리나라의 첫 우주 발사체 나로호(KSLV-Ⅰ)가 오는 26일 발사된다. 발사 시간대는 연구원들의 밤샘 작업에 따른 피로로 인한 인적 오류(Human error)를 피하기 위해 오후 3시30분에서 7시 사이로 예정돼 있다. 발사까지 보름 남짓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나로호의 비상(飛翔)은 이번이 세 번째다. 우리나라는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나로호 발사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차 발사 때는 상단 페어링의 비정상 분리가 원인이었다. 이는 로켓 발사 때 다반사여서, 관련 학계에서는 “운이 나빴다”고 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도전한 2차 발사에서 나로호는 불과 2분여 만에 폭발했다. 아직도 정확한 발사 실패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제작한 1ㆍ2단 로켓 분리볼트 결함으로 추측될 뿐이다.

잇단 발사 실패로 나로호 개발을 총괄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졸지에 ‘죄인’이 됐다. 전임 이주진 원장도 지난해 2월 임기를 남겨두고 사표를 냈다.

같은 해 6월 취임한 현(現) 김승조(62) 원장에게도 이 같은 항우연의 분위기는 무겁게 다가왔다. 김 원장의 취임 일성(一聲)도 ‘나로호 3차 발사의 성공’이었다. 그는 올해만 벌써 열 번 가까이 나로우주센터로 달려가 발사 현장을 점검했다. 우리나라 거의 최남단을 월 1회 다녀온 셈이었다.

김 원장은 취임 이후 늘 주말 서울 자택에 가서도 항상 손이 닿는 곳에 휴대전화를 놓았다. 잠을 청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우연 본부나 나로우주센터에서 넘어오는 긴박한 보고를 바로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그때문이었을까. 지난 8일 대전 어은동 항우연에서 만난 김 원장은 다소 피곤해보였다. 발사 때까지 몇 차례 더 나로우주센터를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로호를 통한 우주개발의 꿈을 말하며 김 원장은 점점 다변(多辯)이 됐다. 그의 손 동작은 더 커졌고, 눈빛도 한층 또렷해졌다. 그는 “나로호 발사 성패와 상관없이 곧바로 상업성을 갖춘 한국형 발사체(KSLV-Ⅱ) 개발에 돌입한다”며 “예산만 충분하다면 당초 계획(2021년)보다 빠른 2018년께 우리 기술로 만든 발사체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번의 발사 실패로 나로호 개발을 총괄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졸지에 ‘죄인’이 됐다. 지난해 6월 취임한 김승조(62) 원장에게도 이 같은 항우연의 분위기는 무겁게 다가왔다. 김 원장의 취임 일성(一聲)도 ‘나로호 3차 발사의 성공’이었다. 그는 올해만 벌써 열 번 가까이 나로우주센터로 달려가 발사 현장을 점검했다.           대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학교 1년 쉬었지만 ‘꿈’ 잃지 않은 소년

‘소년 김승조’는 지금처럼 항공우주공학자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다 김 원장처럼 생존이 우선이었다.

김 원장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이 경영하던 공장이 그만 부도가 나면서, 그를 포함한 7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부모가 도저히 가정을 꾸릴 여력이 안 돼 산가(散家)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김 원장도 고향 대구를 떠나 경북 구미시의 외가로 보내졌다.

얼마 되지 않아 시련이 찾아왔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했지만, 외가도 중학교를 보내줄 형편이 못됐다. 하는 수 없이 김 원장은 진학을 포기하고 외가 농사를 거들었다.

농사는 원래 힘든 일이다. 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김 원장의 적성에는 맞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1년 가까이 산에 올라가 풀을 뜯어 소에게 먹이고, 땔감으로 쓸 나무를 베고, 벼 농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김 원장은 학교를 다니지 못한 1년 동안 꿈을 잃지 않았다. “마을 어른들에게 ‘고 놈, 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죠. 어떻게든 관련 학교를 들어가 ‘농업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그는 “비료 공장을 세우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충주비료 외에 공장이 없어, 농가에 비료가 모자랐다. 그도 논에 난 잡초를 뽑다가 낫에 손을 베기도 했다. 그의 왼손에는 아직도 그때 다친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은 그해 가을이 다 지나도록 ‘잡을 수 없는 꿈’이었다. ‘이대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 하나 보다’고 생각할 때 기적처럼 기회가 왔다. 서울에 있던 고등학생 큰형이 김 원장을 데리러 온 것이다. 중학교 입시를 불과 보름 남겨둔 때였다.

김 원장은 “입시 문제집을 외우다시피 해 서울 양정중학교에 들어갔다”며 “1년 동안 공부를 놓았더니 곱셈, 나눗셈을 거꾸로 하더라. 애 먹었다”며 웃었다.

당시 김 원장의 집은 단칸방에 모든 식구가 잘 정도로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크게 되겠다”는 꿈 하나로 국민학생 과외와 신문 배달을 하며 용돈과 학비를 벌어, 당시 명문 학교인 서울 경복고에 입학했다.

때문에 김 원장은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당시 공납금을 내지 못하면, (돈을) 낼 때까지 결석으로 처리됐다”며 “중학교 때 3년 내내 개근을 한 걸로 기억하는데 상을 못 받았다”고 전했다.

#‘2지망 과(科)’가 평생의 업(業)으로

대학 진학의 시기가 왔다. 김 원장도 지망 학과를 골라야 했다. 금성사(현 LG전자)가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삼성전자가 막 설립됐던 때라, 취업이 잘되는 전자공학과가 자연계 수험생 사이에서 인기 1순위였다. 자연계 전교 2등이었던 그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당시 원서에는 2ㆍ3지망학과를 쓸 수 있었다. 김 원장은 고민 끝에 항공공학과를 2지망으로 골랐다. 평소 비행기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수학과 과학에 자신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시 결과는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자공학과 대신 2지망인 항공공학과에 덜컥 합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항공우주공학은 김 원장에게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다. 각종 역학 등 물리학을 좋아하는 그에게 항공우주공학은 제격이었다. 탄도 등을 연구해야 하는 발사체 관련 분야가 특히 그랬다.

김 원장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때 마침 세워진 국방과학연구소(이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연구소 1기생이었다”며 “취업과 군대(공군 장교)를 동시에 해결했다. 발사체 관련 분야에 대해 보다 깊게 연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연구소는 ‘국방…’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로켓보다는 미사일 기술을 축적하는 데 우선을 뒀다. 김 원장은 “처음에는 (연구소에) 아무것도 없었다. ‘미사일 형성 설계’라는 책 하나만 달랑 놓고 시작했다”며 “미국에서 (우리 미사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까닭에 각종 제재가 많았던 데다 우리 자체적으로 미사일 기술을 축적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장교 복무 기간을 빼고도 김 원장은 2년여 넘게 연구소에 있었다. 풍동(바람을 일으켜 비행체나 발사체를 실험하는 장치)에서 미사일과 발사체 기술을 확립하는 데 매진했다.

연구소를 나온 뒤에도 김 원장은 항공우주공학으로 유명한 미국 오스틴의 텍사스주립대로 유학해 공기역학, 구조해석학 등을 전공하며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당시 미국은 로켓에서 우주 왕복선으로 관련 기술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며 “발사체 관련 기초 공학을 습득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1986년 귀국,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가 됐다. 이후 각종 연구에 참여해 이름을 날리며 국내 항공우주공학 권위자가 됐다.

그는 소음 없이 수직 이착륙과 제자리 비행을 할 수 있고 추력(推力)의 크기와 방향을 순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이클로콥터를 개발했고, 2004년 아리랑 3호, 2006년에는 아리랑 5호 위성을 직접 기획했다. 2009년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미국항공우주학회(AIAA)가 선정하는 펠로(Fellow)에 뽑혔다.

김 원장은 컴퓨터 분야에서도 유명하다. 유학 시절 컴퓨터를 활용해 구조물 안정성을 계산하는 수치 해석을 하며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그는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삼성전자의 지원으로 세계 랭킹 56위의 계산 능력을 가진 슈퍼컴퓨터를 만들기도 했다.

#“나로호 3차 발사, 한때 반대했지만…”

김 원장은 항우연에 부임하기 전 나로호 3차 발사를 반대한 적이 있다. 그는 “나로호 1ㆍ2차 발사를 통해 기술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고 판단했다”며 “하루라도 빨리 독자적인 발사체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항우연 원장으로 오니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로호 발사의 잇단 실패로 한국형 발사체 개발을 주도해야 할 엔지니어들의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었습니다. 2억달러를 들여 러시아 측으로부터 세 번의 발사 기회를 얻은 이상 남은 한 번을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싶었지요.”

김 원장은 자체 기술 대신 러시아 1단 로켓을 통해 나로호를 쏘아올리며, 발사체 기술까지 동시에 습득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ㆍ대약진)’ 전략을 쓴 데 대해 빠른 시간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는 “8~9년 전 나로호 발사를 결정했을 때 우리에게는 자체 발사체 기술이 없었다”며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발사에 자극을 받은 당시 문민정부는 조속한 발사체 개발을 요구했지만, 당시 우리 기술로는 발사체를 개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했다.

학계 안팎에서는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발사체 기술을 터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발사체 선진국인 러시아와 협력을 통해 발사체 설계와 종합, 발사장 구축, 발사운영 기술 등을 확보했다”며 “발사 전 과정을 다른 나라는 30~40년 걸려서 익혔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 번에 확보한 것이다. 로켓 기술을 지금 누가 가르쳐주냐”고 강조했다.

#“한국형이 아닌 세계형 발사체가 목표”

현재 우주산업시장은 3000억달러 규모다. 지상에서 사용하는 단말기나 영상자료에 들어가는 2000억달러 규모 시장을 빼면 순수한 우주산업시장은 1000억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요즈음 가장 잘나가는 휴대전화시장(2000억달러)에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이 우주에 목을 매는 것은 향후 발달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위성, 우주 정거장 등 각종 우주 비행체를 쏘아올릴 수 있는 발사체 기술이 필수다.

김 원장은 “당장 내년 말에 우주 관광이 시작된다. 아직 걸음마단계이긴 하지만, 우주 정거장은 물론 우주 호텔 같은 것도 머지 않은 장래에 들어설 거다”며 “하루 빨리 한국형 아니 세계형 발사체 기술을 우리가 습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형’이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며 ‘세계형’이라는 표현을 썼다. 발사체를 쏘아올리는 데만 집착하지 말고 보다 싸고 저렴하게 쏘아올릴 수 있는 발사체 기술을 개발해 해외 로켓 발사를 유치하는 등 국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예산도 더 많이 필요할 터. 김 원장은 “향후 한국형 발사체 개발에 필요한 1조6000억원을 2~3년만 앞당겨 지원해 주면 발사체 개발도 2~3년 단축된 2018년께 가능할 것”이라며 “2020년께 본격적으로 시작될 우주 개발에 우리나라도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로호 3차 발사 성공확률에 대해 김 원장은 “평상시처럼 하려고 한다”며 ‘동문서답’했다. 아니 ‘우문현답’이었고 의외로 담담했다. 다소 상기된 반응을 기대했다 부끄러워졌다.

“나로호를 맡은 연구원은 나로호에, 한국형 발사체를 맡은 연구원은 한국형 발사체에 매진할 수 있도록 내가 외풍을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 주려고 합니다. 연구원들에게 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으로 기다려야죠. 성공이든 실패든 (나로호를 통해) 배운 기술을 한국형 발사체 등 ‘미래의 비전’을 위해 잘 적용해야겠죠.”

대전=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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