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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가정신/두산편>위기를 기회로
[헤럴드경제=신소연 기자] 두산그룹은 1996년 유동성 위기 외에도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두산은 이런 시련 앞에 좌절하기보다 현명하게 극복, 시련을 기회로 만들어왔다. 두산이 최고(最古)의 장수기업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두산그룹의 첫 시련은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찾아왔다. 전쟁의 포화 속에 두산그룹의 모체인 두산상회는 개점휴업 상태가 됐고, 그룹의 토대를 마련한 창업주 매헌 박승직은 아들 두병ㆍ우병 형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쓸쓸히 영면했다. 피난지에서 맥주를 만들 계획으로 가져왔던 원료도 모두 썩어버려 마땅한 돈벌이도 없는 상태였다.

당시 박 회장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원조물자를 수송하는 ‘제3모터풀’을 발족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정부는 늘어나는 외국의 원조 물자 수송을 감당하기 어려워 민간에 원조로 들어오는 트럭을 주고 수송업무를 시켰다. 전쟁 전부터 미제 승용차와 트럭으로 운수사업을 했던 박 회장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업이었던 것. 이때 박 회장은 두산상회 이름으로 이스즈 13대와 닛산 1대 등 총 14대의 트럭을 정부로부터 받아 운송업을 재개했다. 그 결과 트럭은 18대로 늘고, 사업 지역도 한강 이북까지 확대돼 동양맥주(현 OB맥주) 인수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두산그룹을 뒤흔든 또 다른 시련은 전 국민이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해준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이다. 1991년 3월 두산전자 구미공장에는 페놀 원액 탱크에서 수지 제조실로 통하는 지하배관 연결부문이 파열돼 30t의 페놀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갔다. 사고의 원인은 공장 자체의 설계 문제 때문이었지만, 초동대응을 소홀히 한 결과 무단 방류한 것으로 사회적인 오해를 받았다. 당시 두산 직원이라고 하면 식당에서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두산그룹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두산그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휩쓸리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박용곤 당시 그룹 회장이 전격 사퇴해 사주(社主)로서 책임을 졌으며, 수질개선사업 기금으로 수돗물에 문제가 생겼던 대구시에 200억원의 통큰 기부를 했다. 또 사고수습대책위원회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29억85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91년을 ‘환경원년’으로 선포하고, 3년간 환경분야에 370억원을 투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산그룹은 환경 분야에 적극적으로 나서 타 기업들보다 한발 앞서 친환경기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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