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규 회장의 성장기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경상남도 거제도 논밭을 뛰어다녔던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 거제도를 떠났다고 한다.“이삿짐을 통통배에다 싣고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했어요. 대여섯 시간은 걸렸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자녀 교육은 도시에서 시켜야 한다고 하셔서….”
어렵게 밟은 부산 땅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신 회장 가족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거제도 땅 팔아서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1년 만에 쫄딱 망했다”고 말했다. 배고픔은 참을 만했다.
하지만 형제와 생이별을 떠올리자 ‘회장’ 신동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3남3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난 신 회장. 사업이 망한 뒤 형님 두 분과 큰누님은 동생 신동규와 같이 살지 못했다. 여러 친척집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 입은 줄었다. 그래도 어린 신동규는 끼니를 원조물품으로 때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 회장이 공부에 소질을 보인 것. “법대 가서 사법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언제 붙을지 모르는 사시를 하려면 어느 정도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돼야 해서….”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정환경 때문에 상처받은 고교생 신동규의 모습이었다.
집에선 학비를 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진로도 법대에서 상경계열(서울대 경제학과 졸업)로 바꿨다. 취직과 행정고시를 함께 준비했다. 대학시절 하숙비가 떨어지면 입주과외를 했다. 스스로 학비 마련하랴 공부하랴 몸은 망가졌다. 과외가 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쉴 수밖에 없었지만, 쉬지는 못했다. 1년간 휴학을 하고 내려간 제2의 고향 부산에서도 신 회장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야 복학할 수 있었다.
신 회장의 첫 직장은 한국은행.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한은에 다니던 중 행시 합격 통보를 받고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선배는 경제관료가 될 수 있으면 공무원의 길을 걸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공직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동석 기자/dsch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