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서상범 기자] 성폭력 피해자들은 두 번 운다. 끔찍했던 폭력에 한 번, 사건 이후 자신과 관련된 소문과 사회적 편견으로 한 번. 성폭행 피해자들을 둘러싼 곱지 않은 ‘시선폭력’과 그들 주변을 악령처럼 떠돌아 다니는 ‘소문폭력’으로 성폭력의 상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피해자들이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사회가 돼야 한다. 헤럴드경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전문가들과 함께 고민해 봤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이임혜경 한국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대표적 유형이 ‘피해자 책임론’이라고 지적한다. “평소 처신을 잘 했으면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을 것, 옷을 야하게 입었다, 밤늦게 돌아다니고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셨다”와 같이 피해자들의 품행을 지적하는 책임론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린다는 것이다. 이임 소장은 “상담을 진행하다보면 성폭력 피해사실을 알리기 꺼려하는 것은 물론 어렵게 본인의 고통을 털어놔도 피해사실을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개선돼야 그들이 상처를 털어놓고 극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성폭력 생존자=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은 피해자를 무력하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피해자’보다 ‘생존자’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김다미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피해자라는 단어는 그 사람이 당한 일에 대해서 상상을 하게 되고 수동적, 소극적 존재로 규정짓게 된다”며 “피해 이후의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 보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피해의 상처에서 벗어났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피해를 공개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토크쇼에 등장한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고 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당당하게 경고하기까지 한다. 1971년부터 열린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도 그중 하나다.하지만 한국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부터 개최해온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거의 유일한 ‘말하기’통로다.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수치가 아닌 극복과 치유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과정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라고 말했다.
▶선정적 언론보도 자제돼야=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활동가는 “언론이 알권리라는 명목으로 피해사실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모두 2차피해와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피해부위가 어디고,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시시콜콜하게 다루는 보도 이후 피해여성이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여성에 대해 묘사할 때 어두운 배경에 움츠린 모습으로 표현하며 부정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언론의 문제점”이라면서 “피해자가 앞으로 어떻게 생존해 나갈 것인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에 보도의 초점을 둬야한다”고 강조했다.
▶피해를 입은 여성의 가족들에 대한 인식과 교육도 중요= 김다미 활동가는 “나주의 고종석 사건처럼 지역공동체가 공고한 경우 가족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는 경우가 있다”며 “가족이 피해자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피해자는 그 어느곳에서 받은 상처보다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는 “초기 피해발생에서는 침착하고 빠른 대응으로, 이후에는 ‘네 탓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고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는 가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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