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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 불태워지길 원했던 카프카,그를 은폐시킨 이현정의 작업
[헤럴드경제=이영란 기자] 화가 이현정이 서울 팔판동의 갤러리 도스(Dos) 초대로 개인전을 연다. ‘허공의 카프카(Kafka in the Air)’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현정의 작품전은 9월 5일부터 9월 11일까지 7일간 열린다.
이번 전시에 이현정은 카프카의 자전적 소설 ‘소송’의 텍스트를 화폭 바탕에 촘촘히 이어 쓰고, 이를 짙푸른 물감으로 지워버린 유화 연작 ‘소송’ 을 출품한다.

이현정의 작업은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저 깊은 곳에 담아둔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가 드러나는 걸 꺼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야기를 살짝 드러내고 싶을 때도 있다. 누구에게나 양면성은 있는 법이다. 바로 이같은 성향이 이현정에게는 유명소설가(카프카)의 소설을 화폭에 쓰고, 지우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쓰고 지우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
<사진제공=갤러리 도스>

이현정은 프란츠 카프카의 삶과 소설에서 작업의 모티프를 얻었다. 중산층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보험공사 직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카프카는 사망하기 직전 절친한 친구(막스 브로트)에게 “내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러나 브로트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사자의 유언을 어기고, 카프카의 작품들을 출간하게 된다. 천재였음에도 막후에 가려졌던 카프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오늘날 실존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게 된 것은 브로트의 결정 때문이었다.

이같은 스토리는 화가 이현정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현정은 세상에 출간된 그의 많은 작품들과 해설서, 관련 연구를 볼 때마다 원인 모를 연민(?)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영원히 파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카프카를 세상에 널리 알린 브로트의 공을 칭송하지만, 이현정은 브로트의 행위가 카프카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원치않게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진 사람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몽상적인 내면생활을 은밀히 기록해온 소설가로서, 스스로의 의도와는 다르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카프카의 이같은 일화에 이현정은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 것. 

이현정의 작업은 글을 쓰는 행위가 외부와의 소통을 목표로 하기 보다, 내적으로 침잠하기 위함이었던 카프카의 소설창작과 궤를 같이 한다. 불확실성과 인간의 내면을 그려냈다는 점에서도 맥이 통한다.
어두운 푸른 빛으로 침잠하는 이현정의 회화는 언어만으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편들을 수용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림 바탕에 흐리게 차곡차곡 씌여진 언어들은 뚜렷한 메시지를 알 순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의미를 추적케 한다.

작품 속 언어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한 강렬한 표현은 고정된 텍스트가 지워지는 과정에서 연상된 이미지이다. 이렇게 흩어진 이미지들은 관람자에게 감성을 공유하는 통로가 된다. 캔버스에 작은 글자를 하나씩 이어 쓴 뒤, 색을 덮어 휙휙 지우는 과정에서 글자들은 의도된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렇게 남은 흔적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감성적 흔적’이 된다.

이 미묘한 감정의 파편들은 쓰고, 지우고, 흐리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며 점차 균형을 잡아간다. 이현정의 이번 작품들은 언어가 지닌 기호학적인 의미와 함께 작가의 내면, 즉 감성을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으로 드러낸다. 캔버스에 쓰고 지우는 행위로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낸 작품들은 보는 이의 감성을 말없이 건드린다.

이현정은 작가노트에서 “타인의 글을 모티브로 작업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카프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다소 현학적으로 보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겐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며 “글을 쓰는 행위가 카프카에겐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파고들기 위함이었기에 나는 카프카의 글을 분석과 해설이 아닌, ‘희석과 은폐’를 통해 다시 써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현정은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이번이 세번째 개인전이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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