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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공권력…‘도둑들’과 ‘이웃사람’만 남았다
자고 나면 터지는 ‘묻지마 범죄’…범죄의 시대 넘쳐나는 범죄영화
‘이웃사람’ ‘공모자들’ 등 범죄물 다시 붐
영화속 사법부·경찰은 무능하거나 한통속
현실에서 느끼는 국민들의 실망감 드러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호텔 앞 거리에서 김모(30) 씨가 원한을 품은 전 직장동료와 행인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4명이 다쳤다. 이른바 ‘여의도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다. 범인이 처음 칼을 휘두른 후 현장 주변 40~50m를 옮겨 다니며 2차, 3차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로부터 늑장 대응이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한 목격자는 112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었다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밝혔다.

지난 4월 수원에서는 “모르는 남자에게 납치돼 성폭행당하고 있다”며 위치까지 비교적 정확히 알려준 한 여성의 신고전화를 경찰이 받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이 있었다. 전화를 받은 112센터 요원들은 죽음의 공포에 떠는 피해 여성의 상황을 심지어 부부싸움으로까지 오인했고 출동한 경찰은 초동 탐문 수사를 소홀히 해 결국 사건은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원춘 사건’이다. 

영화‘ 이웃사람’

하루가 멀다 하고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경찰과 사법당국의 무능한 대응이 연일 질타를 받고 있는 가운데, 범죄를 다룬 한국영화도 잇따르고 있다. 도둑을 비롯해 조폭, 비리공무원은 물론 연쇄살인범과 장기밀매범까지 범죄자가 주인공이거나 주요 등장인물인 작품들이다. 하지만 공권력은 간 데 없거나 늘 뒷북이다. 영화도 우리 사회의 현실처럼 범죄는 있되, 공권력은 없다.

‘도가니’의 소년 소녀들에게는 사법부는 무능함을 넘어 가해자들만큼이나 악질적인, 사실상의 공범이었다. ‘부러진 화살’에서 공권력의 정의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주인공은 비리 공무원 출신의 깡패와 조폭이다. 이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 정치, 입법, 사법권은 오히려 ‘나쁜 놈들’과 한통속이다. 그래서 남은 것이 ‘도둑들’과 ‘이웃사람’, ‘공모자들’뿐이다. 

영화 ‘도둑들’

개봉 첫주 1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영화 흥행세를 이어간 강풀 웹툰 원작의 ‘이웃사람’은 죽이는 자도 이웃이고, 희생자도 이웃이며, 그것을 막을 자도 이웃뿐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반영한다. 제목은 차라리 상징적이다. 검경을 막론하고 공권력에 대한 국민적인 회의와 불신이 ‘이웃사람’만 남긴 셈이다. 30일 개봉하는 ‘공모자들’은 공해 선상에서 범행 대상의 장기를 적출해 중국에 내다파는 장기 밀매범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렸다. 역시 여기에도 경찰은 없다.

한국영화에서 범죄물이 다시 붐을 맞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지난 2010년 전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동,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가 터졌던 때다. 그해 최고 흥행작인 ‘아저씨’는 옆집 소녀를 납치한 인신매매범을 응징하는 전직 국가요원의 활약을 그렸다. ‘악마를 보았다’ 역시 사이코패스에게 약혼자를 잃은 한 남자의 복수극을 다뤘다. ‘무법자’와 ‘파괴된 사나이’ ‘용서는 없다’는 아내 혹은 어린 딸을 흉악범에게 무참하게 잃은 남자들의 추적극이었다. 이들 영화가 유행했던 시기는 유죄 확정 전 흉악범의 신상과 얼굴 공개를 두고 우리 사회에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시기다. 그만큼 흉악범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들끓었고, 가해자에겐 신상공개에서 화학적 거세, 전자 팔ㆍ발찌, 사형 등 극형까지 아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큰 힘을 얻고 있었을 때다. 강력한 공권력과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은 영화의 주인공 직업에서 나타났다. ‘아저씨’에서 전직 국가 특수요원,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국정원 직원, ‘무법자’에서 전직 형사, ‘용서는 없다’에서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공권력의 대리인을 통해서라도 흉악 범죄에 강력한 응징을 바라는 대중의 심리를 반영한 결과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그러나 1년여 후 최근 한국 영화는 공권력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마저 거둬들인 국민의 실망감을 드러낸다. 경찰은 간 데 없고, 이웃사람들끼리의 연대와 감시만이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두겁을 쓴 악마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경찰과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아서 영화는 훨씬 더 흥미롭다. 그러나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 엄습하는 것은 다시 가족들의 밤길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의 공포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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