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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15> 고대 신탁의 고향에서 찾은 오라클...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신비의 땅
【델피(그리스)=이해준 선임기자】터키에서 육로를 통해 그리스로 넘어와 테살로니키와 메테오라, 아테네 등 주요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 고대 그리스의 성지(聖地)였던 델피(Delphi)로 향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델피를 고대 유적지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으나 실제 여행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델피는 신화와 역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델피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90km 정도 떨어진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인구도 2800명에 불과하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려 아침 일찍 서두르면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다. 유적도 밀집해 있어 몇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때문에 가이드북에서도 그걸 권장하고 있었고, 패키지 여행에선 아테네에서 당일치기로 ’찍듯이’ 다녀온다.

우리도 처음에는 델피를 당일치기로 다녀온 다음, 야간 페리를 타고 크레타섬으로 향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하지만 장기여행자에게 ’찍고 달리기식’ 여행은 맞지 않았다. 그것은 단기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우리 여행은 140일을 넘어 장기국면에 접어들고 있어 이제는 관심지를 천천히 돌면서 충분히 느끼고 때로는 되돌아보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델피에서 1박을 했다.

4박5일 머물렀던 아테네 숙소에서 행장을 꾸려 델피로 향했다. 버스가 아테네 외곽으로 나가자 거칠고 황량한 산들이 이어졌다. 산에는 평화의 상징, 올리브 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구릉지나 산 비탈엔 예외없이 올리브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바위로 이뤄진데다 여름철엔 강수량이 적어 다른 농작물을 재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델피 가까이 접근하자 산세가 험악해지면서 풍경이 확 달라졌다. 좌우로 험준한 산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가운데 그 산허리에 마을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버스는 산 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계곡 아래의 분지와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환상적인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델피가 가까워서 그런지 신성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델피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쟁을 하거나 도시를 건설하는 등 국가의 중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의 계시, 즉 신탁(神託)을 받던 곳이다. 오라클(Oracle)이라는 신의 계시는 델피의 신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던 여성 사제들에게 내려졌고, 이 신탁을 아폴로 신전의 남성 사제들이 해석해 왕이나 제후에게 전달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던 셈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델피의 신탁 유적지. 가운데 석조 기둥과 건물 기단부만 남은 것이 유적의 중심인 아폴로 신전이며, 그 위로 각종 공연이 열리던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걸어서 며칠 걸려야 당도할 수 있는 깊은 산골을 신성한 곳으로 삼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확인하기 위해 우주의 끝에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렸는데, 그 독수리들이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델피가 세계의 배꼽, 즉 옴파로스(ompharos)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델피의 지형을 보면 양쪽에 우뚝 솟은 산을 사이로 넓은 분지가 형성돼 있다. 산 뒤로는 또 다른 산들이 첩첩히 이어져 그 깊음을 헤아리기 어렵고, 분지의 아래쪽 끝으로는 에게해(海)가 아스라히 보인다. 신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국의 건국신화로 치자면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하늘에서 내려와 쑥과 마늘만 먹고 인간이 된 웅녀를 아내로 맞아 터전을 잡은 곳인 셈이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신화로만 존재하고 있는 반면, 델피에서는 그것이 현실과 혼돈을 일으킬 정도로 삶과 역사 속에 살아 있었고,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그 스토리를 전해주고 있었다.
 
델피에 도착한 첫날, 고대 체육관 시설(짐나지움)과 아테나 신전을 보아보고, 다음날 고고학박물관과 아폴로 신전과 신탁의 장소, 원형극장, 스타디움 등 핵심유적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대 유적을 돌아보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20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유적이 파괴돼 지금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고, 돌조각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바로 역사와 신화에 대한 이해이며,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델피의 경우는 더욱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델피를 세계의 중심으로 확인한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신전을 세우기까지는 숱한 난관을 거쳐야 했다. 델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미케네문명 시절인 기원전 14~11세기로, 당시 대지의 신인 가이아(Gaia)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1~9세기 아폴로을 섬기고 이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확인한 새로운 부족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가이아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폴로가 가이아 신전을 지키던 뱀 피톤(Python)을 처단하면서 델피가 성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기원전 8~7세기부터 석조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건설된 것은로 델피 유적지 한 가운데 세워진 아폴로 신전과 그 아래쪽의 아테나 신전이다. 이들 신전은 수차례의 재건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해 허물어지고 깎여나가 지금은 기단부와 석조 기둥 몇개만 남아 있다. 게다가 수차례 지진으로 기단부 곳곳이 뒤틀려 있었다.

아폴로 신전으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당시 각 도시국가의 왕이나 제후들이 신탁을 받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면서 세워 놓은 조각과 기념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신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정화한 다음, 양이나 소 등 동물들과 함께 진귀한 예술품 등을 바쳤다. 아테네인들이 갖다 바친 각종 보물을 보관한 ’보물창고’도 복원돼 있었다.

아폴로 신전을 지나니 원형극장이 나타났다. 기원전 4세기 경에 완성돼 서사극을 비롯한 각종 공연이 열렸던 곳이다. 가장 위쪽에는 트렉과 운동장, 관중석을 갖춘 스타디움이 자리잡고 있다. 아폴로가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고 아폴로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4년마다 ’피시안 게임’을 열었던 곳이다. 기원전 582년부터 시작된 이 경기는 이후 근대 올림픽의 모태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탁이 행해지던 장소. 앞쪽에서 질문자가 전쟁이나 도시의 건설과 같은 중요한 결정사항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반대편에 있던 신의 사제가 그걸 해결할 지혜를 주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곳으로 델피에서도 손꼽히는 관광 명소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곳은 고대 신탁의 장소였다. 아폴로 신전 위쪽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서 있었는데, 이를 사이에 두고 신탁이 이뤄졌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스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로 우리 가족이 함께 관람했던 ’나의 로맨틱 가이드’에서 여행자들이 일그러진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 장소였다.

신탁 바위에 도착해 우리도 영화처럼 ’신탁’을 주고받았다. 한 사람이 바위 앞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다른 사람이 신의 자리에서 신탁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가족과 직장, 세계여행에 대한 아빠와 엄마의 질문에 아들이 해답을 제시하고, 학업을 비롯한 자신의 꿈에 대한 형과 동생의 질문에 대해 동생과 형이 신탁을 내려주었다. 장난과 덕담이 절반이었지만, 그것은 서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힐링’이었다. 가족의 애정과 신뢰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대 신탁의 세계에서 가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테네에서 델피로 향할 때만 해도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델피에선 눈발이 휘날리는가 하면, 햇살이 비추기도 하는 변덕스럽게 변해 있었다. 그런 눈발 속에서도 군데군데 서 있는 벗나무와 언덕에 낮게 깔린 데이지들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오는 봄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숨가쁘게 달려온 장기여행으로 점차 지쳐가던 가족들도 델피의 신탁을 받아서인지 눈발 속에서 빛나던 그 꽃망울처럼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델피의 신들이 우리에게 준 오라클은 바로 그 내면의 활력이었다.

/hjlee@heraldcorp.com
고대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는 델피 계곡의 전경. 좌우 양 옆으로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첩첩산중이 이어져 있는 가운데 가운데 긴 분지가 형성돼 신성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신탁 유적지는 사진 왼쪽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겸 디자인포럼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12일 한국을 출발, 가족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와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2명, 중학생인 조카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와 함께 감동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여행 뒷 이야기는 인터넷 여행카페인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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