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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 콘돌리자 라이스의 눈을 통해 본 2000년대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2001년 9월 13일 아침, 나는 욕실 거울 앞에 말없이 한참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우리가 혹시 놓친 것이 있었나? 정신을 차리자. 일단 오늘 하루를 버텨야 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자.”(‘최고의 영예’중)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의 유명한 대사를 연상시키는 이 상황의 주인공은 9ㆍ11테러 이틀 후, 다름 아닌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가안보보좌관이다.

부시 행정부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벌어진 이 테러 사건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8년 내내 부시 행정부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각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미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격동의 시기랄 2000년대의 중심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조용하면서 단호한, 강하면서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여준 라이스에게는 ‘최연소, 첫 여성, 첫 흑인’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그가 부시 행정부 기간 중 보여준 행보는 놀라웠다. 세계를 뒤흔든 사건과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해결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된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서전 ‘최고의 영예’(진성북스)는 8년 백악관 시절의 복기다. 9ㆍ11 테러가 일어난 시점부터, 그 사건이 어떻게 전쟁과 연결되었는지, 또 중동의 화약고와 북핵을 둘러싸고 각국 정상들과 오간 긴박한 협상,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기까지 등 무려 1000페이지에 달한다.

시간 순으로 기록된 이야기는 대통령 만들기로부터 시작돼 한국정치 현실과 겹쳐 읽기로 이끈다. 2001년 3월 7일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 전 벌어진 대북정책에 대한 해프닝도 생생하게 들어있다. 당시 부시 정부의 입장은 햇볕정책을 거부하진 않지만 미국의 방침은 다르다는 점을 전달하려 했는데, 워싱턴포스트에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잇는다는 기사가 실린 것. 라이스는 “회담 분위기는 우호적이었으나 대북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는 조금도 좁힐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9ㆍ11테러 후 국가적 대혼란은 상상이상이다. FBI와 CIA에 쏟아져 들어오는 혼란스런 정보, 백악관 탐지기에 신경마비독소물질의 검출 등 라이스는 당시의 혼란과 사건의 의문이 2004년 9ㆍ11위원회에서 증언할 때에서야 비로소 머릿속에 정리됐다고 말한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불편한 관계와 둘을 다독이며 조율해내는 균형감과 흐름을 꿰뚫는 예리한 눈은 많은 여성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을 만하다.

특히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역할에 대한 그의 명확한 입장은 교본처럼 읽힌다. “정보전문가들이 정책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사실만 보고하도록 하고, 정책적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이 제기될 때 대통령이 불안해하거나 정책적 딜레마에 압도되지 않도록 이끄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서전 속에는 사생활에 관한 얘기들이 쉼표처럼 들어있다. 육상선수로 활동한 이야기, 팀이 경기에서 질 것 같을 때 이상한 버릇,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어머니 덕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벗삼아 지냈다고 털어놨다. 복마전과 같은 세계 각국의 마찰 또는 외교적인 쟁점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각국 정상들에 대한 평가와 호감 등을 드러내는 데도 거침이 없다. 특히 야사처럼 읽히는 흥미로운 일화들도 있다. 카다피 리비아 국가 원수가 2008년 나를 자신의 텐트로 초청했으나 거절했다며 당시 카다피가 저녁 식사 이후 자신에게 ‘아프리카 공주’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만들었다고 말해 당황했으나 나중에 그 비디오를 본 뒤 “괴상하지만 최소한 외설적이지는 않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서전은 현재진행형인 중동 각지의 민주화혁명의 뿌리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읽기가 요구된다.

자서전의 미덕은 역사의 순간을 개인의 체험으로 생생하게 재구성해내는데 있다. 거시사가 담아내지 못하는 또 다른 진실, 공백을 각 개인의 미시사는 채워준다. 더욱이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에 있는 이의 행보는 역사의 중대한 증언이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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