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인(미 캘리포니아주)=미주헤럴드경제 하혜연 기자] 한국 여자양궁이 지난달 29일 올림픽 단체전 7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던 순간 기쁨과 함께 착잡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는 이 사람. 오늘날 한국 여자양궁의 초석으로 기억되는 1984년 LA올림픽 여자양궁 금메달리스트 서향순(45)씨다.
“후배들이 금메달을 얻기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시위를 당길 때마다 숨을 죽이고 얼마나 마른 침을 삼켰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서 씨의 눈자위가 다시 붉어진다.
벌써 28년 전이다. 17세 여고생 서향순은 국가대표로 선발된 후 첫 국제대회였던 LA올림픽에 참가해 당시 유력한 금메달후보로 꼽히던 세계챔피언 김진호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대한민국 올림픽 사상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라는 영예까지 덤으로 얻으며 그녀는 일약 ‘국민여동생’ 으로 떠올랐다.
“솔직히 태릉 선수촌은 기쁨보다는 눈물로 기억된다. 양궁은 올림픽 효자종목이라 불리는데 선수들에게는 그것보다 괴로운 말이 없었다. 금메달은 당연히 따는 것이고 은메달을 따면 죄인되는 거라고 우리끼리 우스개 소리를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국제대회에서 만난 미국 양궁선수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을 알고 서씨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양궁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양궁에 모든 것을 걸고 공부도, 친구도 뒷전으로 미뤄야만하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오직 금메달만 바라고 있다는 사실은 선수들에게는 너무 큰 압박감이 아닐 수 없었다.
2004년 미국으로 건너온 서씨 가족은 스포츠가족이다. 남편은 86 서울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 박경호씨다. 큰 딸은 프로골퍼, 아들은 대학 야구선수다. 늦둥이 막내딸도 골프를 시작했다. 미국에 오면서 활을 다시 잡지 않겠다던 서씨도 운명인 양궁을 떠날 수는 없었다. 평범하게 아이들 키우며 이민생활을 하고 싶었다는 서씨를 사람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서향순이 미국에 왔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사람들이 찾아와 양궁 지도를 부탁했다.
“아이들에게 양궁을 가르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양궁을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과 달리 행복한 양궁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교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양궁을 즐기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행복해진다. 양궁이 이렇게 재미있는 운동인지 옛날에는 몰랐었다(웃음).”
현재 서씨는 오렌지카운티 어바인에서 제2의 양궁인생을 살고 있다. 1년 전 문을 연 ‘HSS 스포츠 아카데미’는 남가주 양궁 꿈나무를 길러내는 데 일조를 담당하고 있다. 서씨의 지도로 남가주 주니어 양궁선수의 30%가 한인학생일 정도이다. 서씨의 제자 중에서 미국 최초의 양궁 금메달리스트가 나올 날도 머지 않았다. 이번 런던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아깝게 탈락했지만 전미 대학랭킹 1위에 올라있는 사라 최(콜롬비아대 졸업)는 서씨의 수제자이다.
“양궁은 어린 학생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는 운동이다. 집중력을 강화시키고 인내심을 기르며 마인드 컨트롤을 배울 수 있다. 아직은 경쟁이 심하지 않아 1년 정도 연습하면 대회에 출전해 입상도 가능하다”
현재 재미한인양궁협회 이사로도 활동하는 서씨는 보다 체계적이고 시스템화된 환경에서 양궁을 보급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꿈은 아웃도어 양궁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드넓은 자연에서 마음껏 시위를 당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제2의 서향순을 키울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말한다.
“제2의 서향순이 금메달리스트를 의미한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양궁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 가끔 신체조건이나 감각 등 욕심나는 아이들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인지 아이를 위한 것인지 먼저 생각한다. 우승이나 금메달이 목표가 아니라 우선 행복한 스포츠맨이 돼야 한다”
런던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다. 보고 즐기는 우리가 조금만 금메달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승리하고 패한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면 그들은 조금 더 행복해 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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