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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0년 유럽인은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에야 출판업 출현
비로소 문화 생산·소비 이뤄져

월터 스콧에서 조앤 K. 롤링까지
한국어판 2790쪽 방대한 분량
유럽 문화 변천과정 다룬 역작



스마트폰 하나로 음악과 책, 영화, 잡지 등 문화 콘텐츠를 매일 폭식하는 시대지만 200년 전만 해도 문화적 산물은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1800년 유럽인 대부분은 읽거나 쓸 수 없었고, 책을 사거나 빌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야 동네 교회나 축제가 전부였다.

문화가 비로소 사고 파는 시장이라는 틀 속에서 유통되며 대량 확산되는 시점을 잡자면 산업혁명에 닿는다. 도널드 서순 런던대 퀸메리 칼리지 교수(유럽비교사)는 1800년을 바로 그 시점으로 잡는다. 그는 이때부터 독자랄 만한 층이 생기고 다수의 인쇄업자와 출판업자, 도서대여점이 생기면서 비로소 도서시장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또 작가, 극작가, 작곡가, 가수, 배우 같은 문화생산자들의 증가,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문화의 생산, 소비의 사이클이 빨라지고 확산 속도가 가속화하는 때도 이즈음이다.

도널드 서순이 10년에 걸쳐 쓴 역작 ‘유럽문화사’(뿌리와이파리ㆍ전5권)는 1800년부터 2000년까지 유럽의 문화시장이 어떻게 팽창해 왔는지 문화 산물의 확산 과정을 통해 살핀다.

저자는 이 200년동안 유럽인들이 생산하고 소비해 온 거의 모든 문화형식의 궤적을 따라간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에서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바버라 카틀랜드의 연애소설, 호가스의 판화에서 연재만화 ’슈퍼맨’까지 문화의 장르를 종횡무진 오간다. 하이든의 교향곡에서 비틀스의 로큰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까지, 또 픽세레쿠르의 멜로드라마에서 연속극 ’댈러스’, 흔히 나누길 좋아하는 평론가들이 말하는 고급문화에서 대중문화 전 영역에 걸쳐 유럽인들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읽고 보고 들어온 문화 산물들이 어떻게 생성, 발전했는지 파고든다.
 
고딕소설 열풍을 풍자한 제임스 길레이의 1802년 판화‘ 놀라운 이야기’. 촛불 아래에서 여성들이 잔뜩 긴장한 채 매슈 루이스의‘ 수도사’를 함께 읽고 있다. 이 방의 장식품들은 소설의 내용을 암시한다(오른쪽). 그랑빌이‘ 라퐁텐 우화집’‘ 늑대와 개’이야기를 위해 그린‘ 오늘의 변신’ 중 한 작품. 그랑빌은 동물의 얼굴 표정으로 인간의 특징을 표현한 70점의 연작 만화 ’오늘의 변신’으로 명성을 얻었다(왼쪽).

한국어판으로 2790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은 모두 5부로 구성, 각 시기별 문화시장의 총아, 소비자층을 기술해 나가고 있다.

제1부 ‘서막’(1800~1830)은 유럽의 문화산업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 벗어나 상품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기 책, 신문과 정기간행물, 악기와 악보, 오페라 연극 등 주요 문화 형식들은 귀족의 전유물에 머물지 않고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으로 자리잡는다.

1830~1880년대에는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제치고 핵심적인 문화소비자로 떠오르는 시기다. 점점 늘어나는 노동계급도 싸구려 연재소설과 정기간행물 등을 통해 문화 산물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탐정소설, 공포소설 등 새로운 장르들이 확립되고 여성 소설가들도 부상한다. 문화시장은 음악산업, 오페라, 멜로드라마와 경가극 등 다양하게 분화, 발전한다.

1880~1920년대는 문화 확산이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대중시장이 출현하고 연재만화와 범죄소설 같은 새로운 문학 장르들이 인기를 얻는다. 축음기의 발명은 음악의 소비와 생산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저자는 이 시기 대중화된 영화야말로 민주적 문화의 선구자로 진정한 ‘대중연예의 시작’을 알렸다고 말한다.

1920~1960년대는 영화와 대중음악이 부상하고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새로운 문화패권국으로 도약하는 시기. 이 시기는 문화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방송은 국가 개입의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나라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 제5부, 1960~2000년대는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게 주된 활동이 된 우리시대의 얘기다. TV가 대중매체로 발달한 과정과 영화관의 부침, 대중용 페이퍼백, 대중음악의 폭발적인 성장, 인터넷 영향 등 현대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른다.

서순이 보는 문화시장이라는 게임의 룰은 반복과 혁신, 복제와 번안이다. 문화만의 특징은 아니지만 성공한 장르와 텍스트는 모방과 번안을 통해 다양한 분화가 이뤄지며 이를 통해 지역문화는 보편성을 띠고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도널드 서순의 야심적 작업은 지난 200년 동안 문화시장에 넘쳐났던 온갖 문화적 산물들을 눈으로 보고 맛보며 즐기는 재래시장을 순례하는 재미를 준다. 이번 한국어판 출판에는 오숙은, 이은진, 정영목, 한경희 씨 등 전문 번역자 4명이 참여해 3년반에 걸쳐 옮기고 편집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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