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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 …이해준의 ‘희망가족’> 강제총파업 ‘번다’로 사회마비…불안한 네팔 현실 피부로…
<8> 지독한 안개로 유명한‘ 부처 탄생지’룸비니의 추억
한 의원 의문의 피살 항의파업 강행
가족들 버스 안에서 수시간 발묶여…

정치·경제 문제로 늘상 불안감
만만찮은 네팔인들의 어깨 위 짐


[룸비니(네팔)=이해준] 룸비니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의 새벽 예불 소리에 어슴푸레 잠에서 깨었지만 한참을 침대 속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부처 탄생지인 룸비니에 안개가 아주 지독하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다. 오늘은 아내와 둘째아들 동희가 이곳으로 오는 날인데, 왠지 불안하다.

우리 가족은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에 입국한 후 카트만두와 박타푸르에서 코이카(KOICAㆍ한국국제협력단)와 NGO(비정부기구)의 자원봉사활동을 한 다음, 두 팀으로 나눠 여행을 계속했다. 필자와 큰아들 창희, 조카 승희는 안나푸르나 등정과 트레킹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포카라를 여행한 다음, 인도와 접하고 있는 룸비니로 먼저 이동했다. 아내와 둘째아들은 박타푸르에 더 머물며 NGO 봉사활동에 참여한 후 우리가 머무는 룸비니의 한국사찰 대성석가사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1주일간 헤어져 있던 가족과 룸비니에서 만나 3주가 넘는 네팔 여행을 마무리한 다음 함께 인도로 넘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3주가 넘는 네팔 여행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셈인데, 그 마지막 순간에 네팔의 오늘을 실감하는 의외의 상황을 만나고 말았다.

아침부터 짙게 내리깔렸던 안개는 종일 걷히지 않았다. 오후가 돼 아내와 둘째아들이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국제사원지구 입구에 나가 한참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카트만두~룸비니 거리가 300㎞에 달해 아침 일찍 출발하면 오후 4~5시에는 도착할 수 있는데, 5시가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안개에 휩싸인 룸비니는 정적 속에 어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다음 아내와 둘째아이를 기다리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3㎞ 정도 떨어진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날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류장에 가서야 사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네팔에서 ‘번다’라는 강제 총파업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원지구에서만 어슬렁거리다 보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졌던 한 의원이 사망한 것이 총파업의 원인이었다. 파업은 오전 10시에 시작돼 오후 4시30분에 끝나 전국의 버스들이 운행을 정면 중단했던 것이다.

통신수단도 마땅치 않아 아내와 둘째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박타푸르의 NGO인 비욘드-네팔(BEYOND-Nepal)에서 활동하는 곰곰이(정성미 씨)에게 연락해 보니 이들이 탄 버스는 오전 8시 카트만두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내와 둘째아이는 지금쯤 룸비니로 오는 산길에 있을 게 분명하다. 결국 오늘 한밤중이나 내일 새벽에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강제 총파업인 ‘번다’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룸비니 국제사원지구의 릭샤들도 손님이 없어 멈춰 서 있다.

번다가 펼쳐진 네팔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긴 여정의 와중에 총파업을 만났을 아내와 둘째아이가 걱정이 됐다. 필자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큰아들은 이들에게 강한 신뢰를 보내며 오히려 필자를 위로했다. 엄마와 동생의 성격이나 그동안의 경험을 볼 때, 함께 차에 탄 외국인들과 함께 안전하게 움직일 것이라며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버스정류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캄캄한 길을 플래시로 밝혀가며 대성석가사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10시 가까이 됐다. 아내와 동희가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설핏 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는데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누군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턱대고 큰아들을 깨워 “엄마하고 동희가 온 것 같다. 나가 봐라” 하고 말했다. 창희도 궁금했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큰아들이 바로 돌아오면 아내와 둘째아이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고,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둘이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밖의 소식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도착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뛰어나가니 아내와 둘째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는 포옹을 하면서 감격스런 만남을 자축했다. 오늘 거의 종일 대성석가사와 버스정류장을 오락가락하면서 걱정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와 둘째아이는 재미있는 것을 경험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이 도착한 사람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예상이 맞았다. 번다가 시작된 오전 10시부터 버스가 몇 차례 가다 쉬다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3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 4시30분 정도에 다시 출발해 한밤중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룸비니에 도착해 숙소가 걱정이 됐으나 마침 대성석가사로 향하는 중국인들이 있어 이들과 함께 걸어서 무사히 도착한 것이었다. 아내는 “걱정 많이 했지?” 하면서 활짝 웃었다.

이렇게 1주일 동안의 ‘따로 또 같이 여행’이 막을 내렸다. 막판에 ‘번다’까지 겹치는 바람에 네팔 여행은 더욱 극적으로 마무리가 됐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튿날 룸비니의 핵심 유적이자 세계적인 관광지인 부처 탄생지와 국제사원지구를 돌아본 다음 셋째 날 인도와 접한 국경마을 소나울리(Sonauli)를 거쳐 인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대성석가사에서 마지막 아침을 배불리 먹고 체크아웃을 한 다음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나오자 마을과 도로가 텅 비어 있었다. 또다시 번다가 벌어진 것이다.

피살된 의원의 사망에 항의하기 위해 주초를 기해 다시 파업에 나선 것이었다. 황당했지만 할 수 없었다. 터미널 주차장에는 발이 묶인 차량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승객들은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오늘 네팔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기가 힘들어 보여 발길을 돌려 대성석가사로 돌아왔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3㎞가 넘는 길을 왔다 갔다 하며 3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숙소를 하루 연장한 다음 자전거를 빌려 타고 주변 마을들을 돌아봤다. 역시 활기가 없었다. 뿌연 안개가 걷히지 않은 가운데 사람들은 길거리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힘이 없었다. 어차피 오늘 할 일이 없으니 느릿느릿 걸어갈 뿐, 서두르지 않았다. 상점들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텅 빈 길에는 자전거와 행인들만 눈에 띄었다. 기괴한 느낌까지 들었다.

네팔의 강제 총파업인 ‘번다’가 벌어지자 발이 묶인 버스들이 짙은 안개에 휩싸인 룸비니 버스정류장에 멈춰 서 있다.

며칠 동안 짙은 안개가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 것처럼 네팔 역시 짙은 안갯속에 휩싸인 것 같았다. 전통적인 왕정국가였던 네팔은 북부의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마오이스트(Maoistㆍ마오쩌둥주의자)들이 1990년대 중반 정부군과의 내전에 돌입하고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면서 새로운 정치 체제로의 변화를 위한 거대한 용틀임을 시작했다.

2006년 11월 정부군과 마오이스들이 10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는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했고, 2년 후인 2008년 4월에 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치르면서 민주정치로 가는 첫길을 열었다. 이어 2008년 6월 갸넨드라 국왕이 물러나면서 왕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네팔은 공식적으로 공화정 국가(republic state)로 전환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만들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2008년 선거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마오이스트들이 진보 진영의 연합 정부를 구성해 정부를 이끌었지만, 이후 헌법 제정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연합 정부가 와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기존 마오이스트 반군과 정부군의 통합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며 극도로 불안한 모습이다.

우리가 네팔에 머물 때 각 정파가 6개월 이내에 헌법을 제정하기로 하는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있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었다. 정치에 대한 불신도 높았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갖가지 이유로 벌어지는 파업은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국민 불안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룸비니 버스정류장 앞의 한 식당 주인은 파업으로 생활에 지장이 많겠다는 지적에 “정치가 문제”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다음날에는 번다가 벌어지지 않아 우리 가족은 비록 일정이 약간 지연되긴 했지만, 네팔-인도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26일 동안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네팔 여행이 남긴 마지막 인상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곳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피우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펼쳐지고 있지만 네팔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많고 험해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깊은 종교적 신념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순박한 네팔인들이 짊어져야 할 짐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네팔은 ‘신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많은 신을 모시고 산다. 거리 곳곳은 물론 각 가정에도 신상이나 사진이 걸려 있다. 네팔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과 함께 산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나라’ 네팔에 강림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현재의 암담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노력이 있어야만 그들이 갈구하는 ‘신’이 강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드디어 인도 국경을 넘었다.

자유기고가/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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