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한국의 스티브 잡스’ 이수만, K팝 한류를 일으키다…20년 전부터 미래 예측
“이수만은 한류(韓流)의 신화, SM은 한류를 일으킨 회사.”(2006년 10월)

중국의 대표 시사경제잡지 ‘환치우’가 전 세계 스타 제작회사의 노하우 편에서 다룬 SM엔터테인먼트와 이수만(60) 프로듀서에 대한 소개 글이다. 2000년 H.O.T.의 중국 베이징(北京) 콘서트에서 처음 생겨난 ‘한류’라는 문화 키워드는 이수만이라는 프로듀서가 있기에 가능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이수만 프로듀서가 1995년 설립했지만 구상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전 세계 음악시장의 패러다임이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판단했다. 비주얼, 댄스 음악이 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봤다. 아시아 시장의 가능성도 눈에 들어왔다.

인기 정상의 가수와 라디오 DJ,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토크쇼 진행자였던 이수만은 81년 미국 유학 중 MTV가 개국하는 것을 보고 미래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외국 스타들에 열광하던 80년대 한국을 바라보면서 “한국의 콘텐츠나 가수는 외국에 가서 왜 안 될까”라는 의문을 품은 것도 이때다. 71년 그룹 ‘4월과 5월’로 데뷔한 뒤, MBC 신인가수상과 10대가수상을 수상하며 라디오 DJ(74년)에 이어 ‘이수만과 함께’(80년)라는 토크쇼를 진행하던 방송인 이수만이 프로듀서로 ‘인생 2막’을 시작한 계기가 이때 마련됐다.

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원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 석사학위를 마친 뒤 한국에 돌아온 이수만 프로듀서는 89년 ‘SM기획’을 설립하고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 제작으로는 큰 비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광고 단가에 제한이 없으므로 콘텐츠가 대박이 나면 광고가 많이 붙고 배우 출연료도 껑충 뛰고 제작사의 이익이 늘어나지만, 한국은 광고 단가가 제한돼 제작사의 이익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차기작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는 구조였던 것.

‘광고 단가의 비자율화’가 한국의 문화산업이 미국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한 이수만 프로듀서는 95년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케이블TV 등장과 함께 광고 단가 자율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방송사와 케이블TV에 프로그램을 납품하려면 주식회사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광고 단가 자율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음악 기획을 계속해 오던 이수만 프로듀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매니지먼트 사업에 나섰다.

“엔터테인먼트가 산업적으로 발전하고 해외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수 한 팀이 아니라 계속 가수를 프로듀싱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이수만 프로듀서는 초기부터 ‘시스템’과 ‘글로벌’을 강조하며 미래를 예견했다. 주먹구구식 비즈니스에서 탈피해 캐스팅과 트레이닝, 매니지먼트, 글로벌 프로모션 등 모든 것을 시스템화한 것.

미국의 경우, 가수가 유명해져서 뜨게 되면 음반사, 에이전시, 매니저가 붙고 가수가 직접 레이블 음반사와 에이전시를 고르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SM엔터테인먼트는 회사에서 원석을 발견해서 보석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투자하고 보석이 된 이후 유통, 홍보, 마케팅, 광고까지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SM만의 일명 ‘360도 비즈니스’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엔터테인먼트업계만의 특징적인 툴(Tool)로 자리를 잡았다.

‘시스템’과 ‘글로벌’을 키워드로 미래를 대비해온 이수만 프로듀서는 97년 H.O.T.란 그룹을 만들고 2000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해외에 진출시켰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음악시장은 약 4000억원 규모였다. 당시 13억 인구라는 잠재력을 보유한 중국, 7조원 규모의 음악시장이 형성된 일본과 비교하면 SM의 글로벌 시장 공략이 얼마나 발빠르게 이뤄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SM이 배출한 첫 번째 스타 H.O.T.가 ‘한류’ 신드롬을 일으킨 뒤 계약이 만료돼 회사를 나갔지만, SM은 ‘이수만식(式) 시스템 경영’을 토대로 K-팝 스타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한국을 넘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2001년 보아의 데뷔를 시작으로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f(x)까지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SM은 일본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보아는 2008년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메인 스트림 음악시장에 진출해 음반을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SNS 활성화를 예측했고, 지난해 ‘SM타운 프랑스 파리 공연’을 성공시키며 K-팝 열풍을 전 세계적으로 이슈화시켰다.

H.O.T.를 비롯해 SM이 만든 모든 음악 제목에는 영어 부제가 달려 있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한국 스타들의 해외 진출을 염두에 뒀던 이수만 프로듀서는 해외시장 공략을 대비해 약 20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다. 2001년에는 S.M.Entertainment Japan을 설립하고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으며, 홍콩과 미국, 태국에 잇달아 현지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시장 진출 기반을 다졌다. 외국인 법인 설립이 불가능한 중국에는 대표처를 두고 있다.

가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곡’이라고 강조해온 이수만 프로듀서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해외 박람회를 찾아다니면서 곡의 권리를 사왔다. ‘라이팅 캠프(Writing Camp)’를 통해 미국의 유명 안무가들과 합작해 세계 최대 음악박람회인 미뎀(MIDEM)에 참여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쌓아갔다. SM이 다양한 장르의 외국 노래를 셀 수 없을 만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다.

SM의 콘텐츠와 조직을 움직이는 힘은 ‘360도 비즈니스’를 토대로 한 프로듀싱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있다.

CT(Culture Technologyㆍ문화기술)로 요약할 수 있는 이수만의 프로듀싱 능력과 탁월한 혜안, 브레인 스토밍을 통한 아이디어 창출, 새로운 흐름을 읽는 능력, 한발 앞서가는 비즈니스 전략 등이 SM만의 경쟁력이다. 특히 ‘커뮤니케이션ㆍ경제성ㆍ타이밍’은 SM의 기본정신이자 이수만 프로듀서가 가장 중시하는 세 가지다.

SM의 시스템은 이수만 프로듀서와 직원들 간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과 피드백을 통해 정립됐다. 정기적인 회의는 없지만 수시로 전화, 문자, e-메일, 콘퍼런스 콜 등을 총동원해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진다. 문화와 콘텐츠, 트렌드를 다루는 문화산업의 성격상 시기적절한 결정과 출시는 생명이다.

SM은 이수만 프로듀서가 설립한 지 2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관한 한 A부터 Z까지 이수만 프로듀서가 디테일한 것까지 모두 챙긴다. 아이폰을 만든 애플의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완벽주의와 닮은꼴이다. ‘독보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해외에 팔고 마케팅할 수 있는’ SM만의 20년 가까이 축적된 노하우와 네트워크, 인적 자원은 이수만 프로듀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장연주 기자/yeonjoo7@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