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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 이해준의 ‘희망가족’> 짜장면 배달경험 살려 네팔서 피자집…한국시스템 도입해 대박
<7> 한국 불법체류자서 사업가로 변신한 네팔인 ‘비자야 구룽’씨
20대부터 인천 신발공장서 근무
18시간씩 일하며 소중한 경험 쌓아

한국인의 근면·성실성 예찬하며
‘네팔인도 할 수 있다’는 신념 강조
그의 열정 보며 신선한 충격받아


[포카라(네팔)=이해준] 박타푸르에서 비정부기구(NGO) 자원활동을 마친 다음 우리 가족은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 1주일 동안 여행했다. NGO 지원활동을 더 하고 싶어한 아내와 둘째 아들 동희는 박타푸르에 남고, 필자는 큰 아들 창희, 조카 동희와 함께 트레킹으로 유명한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Pokhara)로 이동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포카라 북쪽의 사랑고트(Sarangkot)에 올라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츠레의 환상적인 일출 장면을 보기도 하고, 자전거를 빌려 페와호(Pewa Lake) 주변을 돌고 보트를 타기도 했다. 페와호 건너편의 일본산묘법사(日本山妙法寺)에 올라가 포카라 일대를 내려다보는 여유도 즐겼다. 티베트에서 네팔로 넘어오면서 히말라야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생략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다가 비자야 구룽(Vijaya Gurung)이라는 흥미로운 네팔인을 만났다. 낯선 곳에서 우연한 기회에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인데, 비자야가 우리에게 그런 큰 기쁨을 주었다.

사건은 우리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앞의 한 피자집에서 벌어졌다. 저녁 때가 되어 피자를 주문해 먹으려는데 한 네팔인이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세요?”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 불법 체류했던 노동자 출신으로 네팔의 신진 사업가로 변신한 비자야 사장이 자신의 피자가게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그동안 네팔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네팔인을 많이 봤기에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가 “내가 피자집 주인이에요”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냥 약간 건성으로 “아~그러세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하고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포카라의 다른 곳에도 피자집이 하나 더 있고, 한국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좀 흥미가 생겼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한국에 4년 정도 있었고, 인천 신발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한국에 왔던 네팔 노동자가 고향에 돌아와 피자집 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피잣집 앞 길가에 세워두었던 멋진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튀어올라 그에게 뛰어갔다. 막 출발하려는 그를 잡아 세웠다. 특유의 기자 정신이 발동했다. 그는 충분히 ‘얘기꺼리’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얘기하자 차에서 내렸다. “나는 한국의 기자다. 당신의 이야기기를 좀더 듣고 싶다”며 그에게 시간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약속이 이루어져 다음날 점심 때 그의 다른 피자집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비자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법을 어기고 공장에서 일을 했던 불법 체류자 출신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활력 넘치는 42세의 네팔 사업가로 변해 있다. 친구들과 공동으로 포카라에 피자집 2개를 운영하고 있으며, 별도로 인터넷 카페와 여행사를 갖고 있다. 딸 2명과 1명의 아들을 거느린 가장으로, 작은 집에 승용차까지 갖고 있는 네팔의 중산층이 됐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흥미가 넘쳤다. 비자야 사장이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91년 11월로,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처음 3개월 동안 경기도 용인의 한 프라스틱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일은 고달프고, 날은 춥고,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아 혼자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비자기간이 만료된 후 비행기에 오르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불법체류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간 곳이 인천의 한 신발공장이었다. 그는 여기서 마음씨 좋은 사장을 만나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눈을 뜬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문이 밀릴 때면 하루에 18시간을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1년 6개월 동안 이 공장에서 일한 후 1993년 고향 포카라로 돌아와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자신의 사업에 착수했다. 비자야는 당시 한국에 불법체류자 관리제도가 허술해 출국할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비자야는 네팔에서 사업이 지지부진해 돈도 떨어지고, 네팔 정국도 어수선해지자 2002년 다시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전에 일했던 인천의 같은 신발공장에 들어가 2년간 죽도록 일했다. 신발공장 사장님과 아주 친한 관계가 돼 사장님 부인에게는 ‘누나’라고 부르고, 사장님 자녀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가 됐다.

그러다 2004년 다시 네팔로 돌아와 인터넷 카페와 여행사를 차렸다. 한국에서 일한 것처럼 네팔에서도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 지난해 피자집을 차렸다. 한국의 ‘자장면’ 배달을 체험한 그는 포카라에서는 처음으로 피자 배달 시스템을 도입해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으로부터도 인기를 끌고 있다. 앞으로 피자집을 카트만두로 늘리고,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을 네팔에 도입하기 위해 한국에 가서 기술을 배우고, 기계도 도입할 계획도 갖고 있다.

새벽에 사랑고트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의 모습으로, 아침 햇살을 받아 하늘에 떠 있는 듯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비자야 사장의 사업이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네팔 사정을 감안하면 성공한 인물이었다.

비자야는 “네팔 사람은 나를 성공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일하고 생활하는 것을 많이 배운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며 네팔 사람도 한국인의 근면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네팔 사람이 여기에서 할 일이 없다면서 외국으로만 나가려고 한다”며 “하지만 여기에도 얼마든지 해야 할 일이 많고, 비즈니스 기회도 많아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비자야는 “한국 사람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며 “네팔 사람에게도 한국에 1년만 갔다가 오라고 말한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네팔인은 돈만 생각하고 일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외국물’을 먹은 네팔 신진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의 경제개발 초기, ‘열심히 일하자, 하면 된다’를 외치던 사업가와 경제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또 사회 시스템이나 제도보다는 ‘개인’의 능력이나 태도만을 중시하는, 성공한 사람 특유의 ‘근면 지상주의’ 냄새가 짙게 풍겼지만,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계발해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 하지 않고 타성과 관습에 젖어 있는 많은 네팔인과 달랐다.

비자야가 한국어를 유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서 우리의 대화는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면서 1시간 이상 지속됐다. 그의 이야기에 대학생인 큰 아들 창희와 중학생인 조카 승희도 큰 관심과 흥미를 갖고 귀를 쫑긋했다. 특히 한국인이 열심히 일하며, 네팔인이 한국인만큼만 일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한국인을 예찬할 때는 상당히 고무된 모습이었다.

비자야의 성공 스토리와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여행을 함께하고 있는 아이들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비자야의 이야기는 네팔이나 한국이나, 필자나 아이들이나 모두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 많았다. 누구나 자신의 일이나 목표에 애착과 정열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성취를 이루고 또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비자야 사장과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행자 숙소 밀집지역인 레이크사이드(Lakeside)와 달리 포카라 구시가지 일대는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소란하고, 지저분하고, 매연과 먼지가 넘쳤다. 네팔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비자야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아이들에게 수차례 이야기했다. 그와의 만남은 필자나 아이들에게나 신선하고 흥미로우며, 네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포카라가 준 여행의 기쁨은 다른 무엇보다 새로운 ‘네팔인’과의 신선한 만남이었다. 

자유기고가/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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