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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리세스 오블리주>⑩富의 인문학자들의 생생 토크/‘슬로우 라이프(Slow Life)’가 나눔을 바꾸는 힘
[헤럴드경제=김영상ㆍ신상윤ㆍ서지혜 기자]인문학자들은 우리사회에서의 ‘나눔’을 본질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인문학적 토대로만 가능하며, 인문학적 소양 중에서도 ‘슬로우(Slow) 문화’의 공유 폭을 넓힐 때 나눔의 진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헤럴드경제는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부자의 자격-신(新)리세스 오블리주’ 시리즈와 관련해 인문학자 5명과 ‘솔직 토크’를 진행했다. 솔직 토크에는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 조우호 덕성여대 교수, 임진호 초당대 교수, 박일렬 강남대 교수, 고승철 소설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슬로우 패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70년대 성장위주의 가치관에 매몰되고, 무조건 속도시대를 강조하다보니 사람들이 ‘소통’의 인문학적 정서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에 시대적 화두인 나눔도 형식적으로 치우치고, 진정한 ‘부자와 빈자의 소통’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발 글로벌경제 위기와 휘청거리는 한국 경제의 원인 중 하나로 속도경쟁을 꼽았다. 본질적인 인류의 삶의 진화라는 고민 없이 스피드(Speed)와 효율, 성장만 중시한 경제구조가 지구촌의 동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이 자본주의 위기와 폐해를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인문학자들의 예리한 진단을 들여다본다.
‘부(富)의 인문학’ 전도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유럽발 글로벌 경제위기와 이에따른 한국사회의 혼란 원인 중 하나로 ‘속도 전쟁’을 꼽았다. 성장에 매몰된 전세계적 흐름이 삶의 가치관 혼돈은 물론 글로벌경제 좌표에 대혼란을 줬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같은 위기 탈출의 한 방법이 ‘슬로우(Slow)’라고 했다.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 둔 속도조절과 궁극적인 ‘느림의 미학’이 세상을 바꿀 힘이라고 했다. 조우호(왼쪽부터) 교수, 고승철 소설가, 한동철 교수, 임진호 교수, 박일렬 교수가 헤럴드경제 1층 정원 의자에 앉아 환담을 하고 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조우호 교수(덕성여대 독어독문학과)= ‘슬로우 문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집중 분석은 인문학의 주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부의 인문학’에서도 중요한 화두다. 현대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해 온 원동력 중 하나가 속도다. 시간은 돈이다. 시간을 바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쓸수록 돈이 모이게 되고, 돈을 벌 수 있게 됐다.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 방향을 잃었다. 이럴때 ‘슬로우 문화’는 현대에 지속적으로 강요된 효율지상주의, 성과지상주의, 목적만능주의에 대항해 이것을 인간과 인간의 행복을 중심으로 보완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 즉 효율과 함께 공존도 지향하며, 성과와 함께 과정도 중요하게 보며, 목적만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의 정당성에 더 관심을 갖는 시각을 말한다.

이것을 단순히 생활의 여유나 여가활동 등의 관념과 연관시키면 자칫 슬로우 문화가 ‘가진 자’나 부자의 여가와 여유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빈자가 볼 때 부자가 지금도 누리는 일종의 사치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경계하면서 슬로우 문화 저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승철 소설가=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발달하다 보니까 도대체 뭣 때문에 살아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매우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왜 돈을 버는지 알지 못하고, 정작 번 돈을 쓰지도 못하고 죽을 때 되면 번 돈이 아까워서 억울해하면서 눈을 감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는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인문학적 바탕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인, 즉 슬로우를 주창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우리는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기를 강요당한 나머지 삶의 방향을 잃었다. 그러다보니 나눔의 방향도 헤메고 있는 것이다.

▶박일렬 교수(강남대 세무학)=옛날 얘기 하나 하겠다. 대학생 때 김우중 회장을 우연히 만난 적 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김 회장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재벌 총수는 웃을 일이 없다네”라고. 흔히들 ‘행복=성공=돈”이라고 한다. 우리 얘기지만 조교수 되면 정교수가 되고 싶고, 직장인은 사장이 되는 게 꿈이다. 젊었을때 죽어라고 연구하고 공부하고 강의했는데, 지금은 친구들은 다 떨어지고 가족들과 멀어졌다며 후회하는 주변인이 많은 게 사실이다. 나눔은 개인이 행복해야 실천할 수 있다. 개인이 행복하려면 인문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삶의 여유를 가지면서 자기 손에 잡히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느리게 살기’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느리게 살기’는 사실 지구 온난화, 에너지 문제 등도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위력적인 도구다.

▶임진호 교수(초당대 한중정보문화학과)=맞는 말이다. 우리는 500년 성리학에 머무르다가 40년 일제시대를 거쳤고, 성장에 매몰된 60~70년대를 보냈다. 과학기술 성장 속도는 눈부셨지만 그에 따른 인문학적 고민은 미흡했다. 칸트는 말했다. “과학없는 종교는 장님,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어우러질때 삶의 질이 높아지고, 주변을 배려할 수 있는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우리는 너무 과학기술 쪽으로만 달려왔다.

▶한동철 교수(서울여대 경영학과)=최근 삼성가 소송이 화제가 됐었는데, 학생들이 똑같이 말하더라. “그렇게 돈이 많은데 소송이라니, 과연 돈은 얼마나 많이 가져야 많이 가진 것인가 다시 생각을 하게 된다”고. 돈은 상대적이다. 혼자 벌어도 만족하는 이가 있고, 맞벌이를 해도 언제나 모자란다고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서울 25개구를 조사했는데 서초구, 용산구가 행복도가 가장 높고 강남구 송파구가 가장 낮았다고 하더라. 서초ㆍ용산구는 눈에 보이는 빈부격차가 크지 않아 행복지수가 높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슬로우 문화’는 남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편타당한 문화로 확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고 소설가=기업체 강연을 많이 했다. 기업들이 저를 강사로 초빙한 이유는 결국 창의성, 상상력이 요구되는 새로운 경영환경의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고뇌와 성찰이 필요하다. 경영인들도 그런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히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기업들도 효율과 만능의 껍질을 벗고 ‘슬로우’를 접목하는 흐름인 것은 분명하다.

▶임 교수=미국의 산업 직종이 1만여 가지가 된다. 그런데 미국이 먹고 사는 경제 70% 이상이 문화산업이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이다. 그 스토리는 어디에서 올까. 그들 자체에서 안 되니까 동양적 요소를 끌어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원천이 바로 인문학적 요소다. 정작 우리는 인문학을 경제 원동력으로 삼고 있지 못하다. 최근 남원에 갔다 왔는데, 윤리적 소비라는 이름으로 생협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더라. 인상적이었다. 상대적으로 급격히 붕괴된 농촌에서 지역소비라는 ‘나눔’이 더 활발하다는 의미다. 골목상권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한 생존게임이 벌어지는 도시보다 더 낫더라. 이같은 생협과 같은 활동이 확대되고, 도시에 상대적으로 많은 부자들의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박 교수=그 쪽에는 저도 생각이 많다. 덴마크는 마트의 85%가 생협이다. 동네 사람들이 생산하고 개발해서 지역에서 소비한다. 동네마다 독특한 맛과 문화가 있고 산업이 있기에 자립 구조가 굳건히 구축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기업형 슈퍼가 동네에 들어서 다 죽는 일은 없다. 그것이 바로 나눔 아닌가. 생협 위주로 돌아가다보니 동네 고용도 잘된다. 생협은 ‘슬로우 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다. 생협이 잘 되면 굳이 대기업과 싸울 일도 없다.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조 교수=괴테의 파우스트 얘기로 우회적으로 말하려 한다. 파우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빨리 건설하기 위해 많은 인부들을 착취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목적에 도취돼 눈이 멀어 겨우 삽질 소리만 듣고 자신의 이상 사회가 건설이 된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착취당한 일꾼들이 그의 무덤을 파는 소리였다. 그 땅은 결국 파우스트 자신의 무덤이 됐던 것이다. 인간 사회 역시 이런 식으로 목적과 효율성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 아닐까.

▶한 교수=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부가 확 늘었다. 10년 사이에 10조원의 부가 늘었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부가 몰리면서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것, 즉 다른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심리적인 빈부격차를 대다수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에 대한 원한이 생겼다. 빈자와의 소통이 절실해진 이유다.

▶임 교수=초당대학교에는 ‘슬로우 문화센터’가 있다. 생긴 지는 얼마 안됐는데, 연구소로 활용하고 있다. 아직은 부자들과의 소통, 사회와의 소통 관점에서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여유있는 삶의 가치론과 관련해 이를 확대, 재생산하면 의미있는 연구가 될 것으로 본다. 어느 유명한 최고경영자(CEO)는 ‘70%만 일하고 30%는 쉬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200% 일하게 한다. 그게 행복과 궁극적 나눔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슬로우 문화는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박 교수=쇠고랑이 99톤의 무게를 끌 수 있는데, 한 고리가 50톤 밖에 못 끈다고 치자. 그러면 쇠고랑의 강도는 50톤인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류 사회라도 한쪽이 약하면 그 사회는 약한 것이다. 부자와 빈자 문제 역시 똑같다. 유럽 사람들은 대개 출세 못했다고, 돈 못벌었다고 그렇게 억울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24시간 내내 일하지만 그들은 오후 6시 전후로 정확히 퇴근한다. 동네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집안 일을 거든다. 이것이 느리게 살기 운동이다. 모두 다소 느리게 산다면 에너지, 환경 문제라든지 사회 고용 문제 등 각박함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다.

▶고 소설가=결국 빨리만 갔지, 옳은 방향인지 깊은 성찰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한 예로 환경파괴 같은 문제가 그렇다. 지구는 안정된 자원을 갖고 있는 시스템인데 속도전쟁은 이를 파괴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슬로우는 그런 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으로 성찰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좀 더 지속가능함과 제대로 된 인류공존의 길을 찾자. 오히려 한 템포 늦추면서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 한다.

▶조 교수=인문학이 지금 기업의 CEO들에게 여유를 위한 교양이나 돈을 더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그 인문학은 필요없다. 인문학은 앞으로 사회 참여형이 돼야 한다. 슬로우 문화에 기반 둔 인문학은 글로벌 경기 위축을 극복하는데도 일조해야 하고, 나눔문화 확산에도 기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자본주의 정책과도 연관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문학은 말잔치에 그칠 것이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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