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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회나무<큰 인물>와 거북이 바위<부귀영화>…예부터 큰 인물이 난다 했지예~”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호암 생가’ 가보니…
곡식 쌓아놓은 듯한 노적봉 집터
그안에 봉황 내려앉는다는 벽오동
앞에는 남강…전형적 배산임수
풍수지리상 명당 중 최고의 명당

5세때부터 천자문과 논어 접하고
조부모와 보낸 안채 좌측방엔
지혜 상징 ‘책 병풍’이 자리하고



[경남 의령=홍승완 기자] 마을 노인정 근처를 지나던 노인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예부터 이 동네에서 그 집 도움을 안 받은 집이 없을 게라. 옛날에는 (생가에 있는) 사랑채 앞의 우물에 인근에 우물 없는 집 사람들이나 지나던 사람이 누구나 와서 물을 길어가곤 했다더라”고 한다.

부모의 넉넉한 마음은 소년 호암이 청년이자 성인이자 기업가로 자아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창업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의 신분을 해방시켜준 일이나, 제일모직 건립과 함께 최신식 설비로 여공 기숙사를 건설한 일, 국내 최고 수준의 문화재단을 건립해 어려운 예술인들을 돕고 오늘날로 치면 ‘나눔경영’에 앞장선 것은 이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으리라. 


호암의 생가는 예부터 명당으로 이름이 높았다. 호암이 유명해진 탓에 구구한 해설이 덧붙여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풍수지리학적으로 생가터는 국내 최고의 명당 가운데 하나다.

이무형 생가관리소장은 “집터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 형상을 하고 있고 내청룡(內靑龍)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터에 혈이 되어 맺혀 있어 지세가 융성하다고 한다”며 “집에서 10리 앞에 진주에서 함안 쪽으로 남강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인 데다가, 집의 앞은 나지막하고 뒤가 높아지는 전저후고에 전약후강 등 세부적으로도 풍수지리상 명당의 요건은 다 갖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 보니 마을에서는 예부터 저 집에서 인재가 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큰 회나무와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벽오동도 집터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예부터 회나무가 있는 집에서는 큰 인물이 난다고 했다.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였던 호암도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들에 익숙했다. 호암이 조부모, 부모와 함께 가장 시간을 많이 보냈을 안채 좌측 방에는 책과 그릇이 그려진 병풍이 서 있다. 바로 그 병풍 밑에서 호암은 할머니ㆍ할아버지와 부모는 물론 마을사람들에게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원대한 꿈은 이렇게 작은 칭찬과 격려로부터 영글어가는 법이다. 그런 호암에게 100여 호가 모여사는 중교리는 어쩌면 너무 작은 마을이었을지 모른다. 

소장의 허락을 어렵게 얻어 생가를 조망할 수 있는 집터 뒷산에 사진기자와 함께 올랐다. 숲과 언덕 사이에 폭 묻힌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암도 이 길을 밟았을 것이다. 마을의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마을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을 게 분명하다. 꿈 많은 소년 호암에게는 마을보다는 언덕 너머 또 물길 너머 보이는 세상이 무척이나 궁금했을 게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친척들의 권유로 누이의 시가가 있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으로 ‘유학’을 가게 된 호암도 훗날 비슷한 소회를 남겼다. 몇 달에 불과한 도시 생활이었지만 호암에게는 큰 경험이었던 듯하다. 호암자전에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한다. 불과 몇 달 안 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진주에서의 생활을 경험하고 귀성한 나로서는 태어나서 자란 중교리는 너무나 좁고 답답한 곳으로 느껴졌다”고 썼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아 귀성한 호암은 마침 내려온 재종형의 이야기를 듣고 더 큰 결심을 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떼를 썼고, 귀한 아들의 깊은 뜻을 인정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서울에서 수송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친 호암은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지만 병환으로 2학년 가을 무렵 대학을 중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당시 농촌에는 생소하던 고등소채(高等蔬菜)를 일본에서 들여오고 개량 돼지와 닭의 원종도 들여와 봤지만 그저 취미 수준이었다. 오히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친구들과 골패에 열중했다. 
호암 생가 방문객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 생가 안쪽의 바위다. 바위에는 길운의 상징들이 가득하다. 바위 좌측 상단부엔 목을 뺀 자라가, 중앙 상단부에는 마치 두꺼비(첫번째 사진) 한 마리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바위 한가운데 하단에는 밭 전(田)자 문양(두번째 사진)이 있다. 마치 밭 전자처럼 생겨 이 집터에 돈이 몰려든다는 곳이다. 부자의 기를 받겠다고 생가를 찾는 이들이 열이면 열, 손으로 문지르고 얼굴로 부비고 간다. 사람들의 손길을 탄 터라 바위가 맨질맨질하다.

당시에 대해 호암은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회고한 적 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사업가 본능은 더 이상 ‘깊은 잠’을 허락지 않았다. 무위도식을 반복하던 어느 날, 그는 ‘사업에 나의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한다.

호암은 이때의 결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는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는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앞에서 그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새길 만한 대목이다.

중교리 생가는 그가 피곤하고 지칠 때 휴식을 줬고, 방황할 때도 침묵으로 함께하는 친구가 돼줬으며, 사업가 영감을 심어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다. 생가를 탈출(?)한 호암은 그렇지만 늘 중교리를 그리워했고, 생가에서 얻은 교훈을 평생 간직하면서 경영에 접목했다. 논어와 함께한 생가는 그에겐 위로였고, 영감의 창고였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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