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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심 다 녹여버린 ‘내아모’ 류승룡의 ‘혀의 맛’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이번엔 활 대신 혀다. 류승룡이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희대의 카사노바로 변신해 영화 흥행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최종병기 활’에선 그가 쏜 육중한 화살이 적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이번 작품에선 그의 혀가 뭇 여인의 가슴을 녹인다.

“어느 배우가 하느냐에 따라 경우의 수가 많고 여백이 컸던 캐릭터입니다. 그만큼 어떤 톤으로, 어떤 뉘앙스로 인물을 보여줄 것인가 결정하는 작업이 어려웠죠. 이럴 것이다 라는 뻔한 예상에 허를 찌르는 캐릭터,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만 극의 얼개를 훼손하지 않는 연기가 필요했죠.”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류승룡은 영화 속에서 보여준 후광이 덧입혀져 흰 셔츠와 흰 바지, 파란 머플러, 흰색 로퍼 차림이 마치 바람둥이의 대명사인 이탈리아 남자 같은 풍모였다. 그가 해석하는 ‘카사노바’는 이랬다. 


“연민, 장난기, 지적 능력, 재력, 심미안, 철학, 여행 등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르네상스적인 남자죠.”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연애할 때는 아름답고 요리잘하고 똑부러지게 말잘하고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였지만 결혼 7년차에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행동이 남편에게 악몽과 공포가 되버린 아내(임수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혼을 하자고는 못하는 소심한 남편(이선균)이 견디다 못해 생각해낸 것이 이웃의 카사노바에게 아내의 유혹을 의뢰한다. 그 바람둥이 장성기 역이 바로 류승룡이다. 요샛말로 ‘손이 오그라들법한’ 대사를 기름 번드르르 흐를 듯한 느끼한 목소리로 천연덕스레 펼쳐놓는다. 류승룡은 여심을 가지고 놀듯, 대사를 자유자재로 맛깔지게 요리한다.

“이 영화 전에 6편의 시나리오를 제안받았습니다. 주저없이 이 작품을 선택했죠.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작품이자 캐릭터였어요. 한편으로는 전작이 흥행됐다고 주연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스토리텔링이 강한 작품을 선택한다, 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죠. 제가 강하고 마초적인 배역에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점까지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민규동 감독은 시나리오를 보여주기 전에 먼저 류승룡에게 “세계적인 카사노바 한번 해 볼 생각 없느냐”라며 운을 띄웠다. 류승룡은 “에이, 장난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받았다. 그러나 농담처럼 받아들였던 프로젝트는 현실이 됐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아르헨티나 영화 ‘내 아내의 애인’(Un novi para mi mujer)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극중에 장성기가 두현(이선균)에게 ‘나는 네 아내를 그냥 원래대로의 여자로 대해줬을 뿐’이라고 말하죠. 이 영화의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아내를 여자로 안 보고 대하는 경우가 많죠. 결혼한 남자에겐 그 대사가 와 닿아요. 저도 때로 집사람과 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

류승룡은 ‘난타’로 시작해 연극과 뮤지컬, 무용, 각종 넌버벌 퍼포먼스를 거치며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 단역으로 영화계에 입성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와 ‘황진이’ 등에 출연하며 빼어난 연기력과 인물 해석력으로 주목받았고, 지금은 ‘대세’라고 불릴 정도로 영화계에서 각광받는 주연배우가 됐다. 하지만 불과 5~6년전인 ‘황진이’와 ‘거룩한 계보’ 때까지만 해도 촬영이 없을 때는 과수원에서 농약을 치고 세차장에서 걸레를 잡는 부업을 해야했다. 보증금 1000만원짜리 전세 옥탑방에 살 때 오직 자신만을 보고 결혼해준 아내가 더없이 소중하다.

“만약 지금 제가 미혼이고 결혼상대자를 구한다면 원석을 못 가려낼 것 같아요. 상대가 오직 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진 것’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아무것도 없을 때 만나서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준 아내가 고맙죠. ”

류승룡은 연기 잘하는 배우다. 관객도, 전문가들도 다 그렇게 말한다. 만장일치의 찬사, 비결은 뭘까.

“연기가 좋아서 하다보니 배우가 된 거죠. 배우가 되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상을 받을 작품만 선택하는 배우도 있구요. 연기 이론가인 스타니슬라브스키에게 제자가 연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더니 첫번째도 두번째도 시간엄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든 게 약속에서 출발하죠. 동료 배우들간의 약속이 팀웍을 이루죠. 또 연기는 관객들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순재 선생님이나 강부자 선생님같은 어르신들은 먼저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그 뜻을 좀 알 듯 해요. 연기란 자기를 갈고 닦고 수신 수양해서 인생을 배 나오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류승룡은 최근 작품 출연이 있다르면서 고민도 했다. ‘지나친 다작으로 나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때 이준익 감독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승룡아, 손톱이 빠지도록 깊게 팔수록 맑은 물이 나오는 법이다.”

류승룡의 차기작은 ‘광해, 왕이 된 남자’와 ‘12월 23일’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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