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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의 희망가족 지구촌 여행기>(1) 옌안, 중국공산당의 어제와 오늘, 박제된 마오
한국을 떠나 여행에 나선 지 가족은 벌써 10개월, 나는 7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홍콩과 광저우(廣州), 창사(長沙),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태산(泰山)과 베이징(北京), 뤄양(洛陽), 시안(西安) 등 동부와 중서부 주요 지역을 샅샅이 훓고 다녔다. 이를 통해 중국을 질리도록 공부해 이젠 아이들도 웬만한 중국사에 대해 풍월을 읊을 정도가 됐다.

특히 동서문화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시안은 병마용과 명대성벽 등 볼거리를 비롯해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시내 중심부는 질풍노도와 같은 상업화와 서구화 바람에 완전히 매몰돼 버렸지만, 골목과 시장엔 한족과 위그르족, 티베트족 등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색다른 맛을 자아냈다. 이를 보기 위한 서양 여행자들도 들끓었다.

시안에 이어 중국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끈 마지막 근거지이자 해방구였던 옌안(延安)을 2박3일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옌안은 가이드북에도 소개되지 않는 변경이지만,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다녀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곳은 창사의 마오쩌뚱(毛澤東) 생가와 함께, 연간 400만명의 중국인이 찾는 홍색(紅色)관광의 메카다.

시안에서 옌안까지는 기차로 3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산시 성 북부의 산세가 얼마나 험한지 철도는 수없이 많은 터널과 교량을 통과했다. 옌안에 접근하니 산기슭마다 파놓은 동굴 주거지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산세가 깎아지른 듯 펼쳐져 있어 굴을 파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곳이었다. 삶을 위한 고단한 투쟁의 흔적들이었다.
대장정에서부터 현대 중국 설립까지의 역사를 전시해놓은 옌안혁명기념관 앞에는 해방구였던 옌안 시내를 내려다보는 듯한 마오쩌둥의 동상이 엄청난 크기로 세워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다.

옌안역에 도착하자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민족성지 홍색연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民族聖地紅色延安歡迎你)’라는 대형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엔 오성홍기와 공산당 깃발이 곳곳에 걸려 있어 이곳이 공산당의 성지(聖地)이자 국민적 교육장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도 몰려왔다.

첫날엔 가까운 옌안혁명기념관(延安革命紀念館)을 관람했다. 폐관 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아 도착했으나, 리보(李博)라는 24세의 열정적인 직원의 도움으로 개관 시간을 1시간 연장하면서 상세히 관람할 수 있었다.

혁명기념관에는 옌안을 이렇게 설명했다. “옌안은 중국 혁명의 성지이자, 근대 중국의 탄생지이다. 홍군과 노동자 농민으로 구성된 대장정이 옌안에서 끝나면서 전국적 승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1935~1948년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옌안에 있었다. 옌안이 새롭고 실험적인 민주적 시스템을 구현하는 핵심이 되었으며, 중국 인민들의 해방투쟁의 지휘부였다….” 옌안이 없었다면 오늘의 중국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주요 회의가 열렸던 양가령 중공대예당 내부. 마오쩌둥을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그의 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채택한 1945년 제7차 전국대표대회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1934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대장정에 나선 마오는 1937년 1월 13일부터 1948년 3월 18일까지 12년2개월 동안 옌안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마지막 혁명 투쟁을 주도했다. 중국 남부 광둥에서 옌안까지 2만5000㎞에 걸쳐 진행된 대장정 기간 동안 홍군은 8만명에서 7300명으로 줄었다. 20만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얼어 죽고 굶어 죽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가장 척박한 옌안이 새 희망의 출발지였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안내를 자청한 리보는 공산당원 수가 1937년 4만명에서 1945년엔 90만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4억명이라며, 자신도 공산당원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둘째날과 셋째날엔 혁명 유적지들을 관람했다. 당시 공산당의 선전매체인 신화사(현 신화통신)와 해방일보(解放日報), 신화서점 등이 자리잡아 언론과 출판의 메카였던 청량산(淸凉山)에 이어,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주거지를 돌아보았다.

마오는 옌안으로 들어와 1938년까지 약 2년간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기거하며 투쟁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되자 근거지를 아예 옌안 북쪽 외곽의 양가령(楊家岭)으로 옮겨 1947년까지 10년간 기거했다. 봉황산 유적지에는 일본군의 대공습 당시 공산당 지도부가 긴급히 대피했던 동굴을 과거 모습대로 재현해 놓아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상황을 실감케 했다.

특히 양가령은 공산당 지도부가 가장 오랫 동안 머물며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일제와의 투쟁을 지휘하고 중국 혁명의 주요한 방침들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혁명유적지였다. 입구에는 마오의 젊은 시절을 담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고, 주변은 아주 말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흙으로 된 바닥은 빗자루로 싹싹 쓸어져 있었다.
옌안 시 북쪽 끝에 위치한 양가령의 마오쩌둥 옛 주거지. 마오는 산 기슭에 굴을 파고 지은 이 집에서 1938년 말부터 1947년까지 10년간 마지막 혁명투쟁을 이끌었다. 옆에 유사오치 등 다른 지도자들의 주거지가 있다.

입구를 지나니 공산당의 주요 집회가 열렸던 중공대예당(中共大禮堂)과 옌안문예좌담회(延安文藝座談會)로 유명한 중앙당 건물이 차례로 나타났다. 이 좌담회는 마오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 이른바 ‘마오 강화’를 발표한 회의로, 사회주의 문예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1980~90년대 리얼리즘 논쟁이 한창 벌어질 때 많이 거론되었다.

중공중앙구지 뒤편의 산 언덕에 혁명가들의 옛날 거주지가 나타났다. 마오의 집을 비롯해 이론가 류샤오치(劉少奇), 군사 지도자 주더(朱德), 2인자이자 대외교섭통이었던 저우언라이(朱恩來) 등의 주거지가 잘 단장돼 있었다. 이들 주거지는 산 중턱에 굴을 파고 지은 것으로, 각각 서너 평이 될 만한 거실과 침실로 이뤄져 있었다. 아주 소박한 공간이었다.

어제 옌안혁명기념관을 안내했던 리보가 “국가 원수 가운데 이렇게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하고 되물었던 게 떠올랐다. 엄혹한 조건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험한 음식을 먹으며, 몇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생활했지만, 그들의 열정과 정신은 광대한 중국 전역을 넘어 세계로 뻗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인간정신의 승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1세대 중국 혁명가들의 옛 주거지에는 홍색 깃발을 앞세운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쉼 없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대예당을 방문했을 때에는 한 무리의 중국 ‘홍색관광단’이 1층 강당에서 손뼉을 치고 공산당가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민족학원의 유적지는 찾을 수 없었다. 역사를 가르치는 아내는 특히 협동조합의 모태가 된 이곳에 관심이 많았다. 인근 가게에 들러 주민들에게 민족학원이 표시된 지도를 들이대며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도의 위치를 따라 여러 차례 돌았지만 헛수고였다. 그곳엔 아파트를 비롯한 재개발 공사만 벌어지고 있었다. 정치적 필요가 있는 유적지에는 열과 성을 다하면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은 방치된 것 같아 아쉬웠다.
하루 한걸음 가족들. 왼쪽부터 부인 이경란, 이해준 전 헤럴드경제 디지털뉴스센터장, 둘째 아들 동희, 첫째 창희, 조카 승희. 칭창열차를 타고 라사에 도착해 찍은 사진이다.

유적지 관람을 마치고 중심가로 돌아오자 상업주의의 물결이 넘치는 옌안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혁명 유적지들을 돌아봐서 그런지 강한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인구 40여만명의 작은 소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많이 들어선 상가와 넘치는 쇼핑몰들, 새롭게 단장한 상점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새 쇼핑몰과 호텔, 아파트를 짓는 공사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복잡한 중심지를 걸으면서 ‘양가령 언덕에 굴을 파고 모진 풍파를 헤치며 싸웠던 마오가 꿈꾸었던 세상이 이것일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봉건제와 식민지의 굴레를 끊고, 인간 해방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마오도 이런 세상을 그렸을까, 초고속 성장과 패권에 집착하는 지금의 중국이 과연 그에 부응하고 있는 것일까,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면서 각종 경제적 사회적 갈등은 물론 정치적 갈등이 심화하는 중국의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끝없는 질문이 몰려왔다.

또 마오는 신격화된 존재에서 이제는 어느새 ‘박제된 역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오는 오늘날의 중국 지도부에 의해 끊임없이 추앙되고 있지만, 진정한 마오 정신, 그의 순수한 혁명정신은 사라진 것 같았다. 중국의 혁명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시안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도 마오의 잔영은 떠나지 않았다. 혁명가들이 처절한 투쟁을 지휘하던 현장을 직접 살펴본 지적 쾌감은 아스라이 멀어지고,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화려한 광고간판 속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이 몰려왔다.

자유기고가 이해준/hjlee@heraldcorp.com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전 헤럴드경제 디지털뉴스센터장은 지난 10월 12일 한국을 출발, 가족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럽~미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새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와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2명, 중학생인 조카 1명 등 4명은 앞서 7월 16일 한국을 떠나 필리핀에서 2개월간 영어공부를 한 다음, 9월 20일 홍콩을 시작으로 광저우(廣州), 장자지에(張家界), 창사(長沙),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등 중국 남부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이들은 가장인 이 전 센터장과 상하이(上海)에서 만나 항저우(杭州) 황산(黃山) 취푸(曲阜) 타이산(泰山) 베이징(北京) 등 동부지역과, 뤄양(洛陽) 시안(西安) 등 중서부 내륙, 티베트를 거쳐 네팔~인도로 이어지는 루트를 육로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여행 뒷이야기는 인터넷 가족여행 카페인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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