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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예술적 영감 ‘절묘한 콜라보레이션’…디자이너 양희민, 가수 이이언·화가 이이립과 협업 통한 제3의 길 모색
낯선 전자음이 귓가를 때린다. 유명 외국곡 짜깁기가 대부분인 국내 패션쇼에서 듣기 힘든 음악이다. 무채색 옷에 그려진 얼굴과 팔이 잘려나간 날카로운 그림이 시선을 잡아끈다. 디자이너의 솜씨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작품일까.

젊은 디자이너들의 실험성이 돋보인 지난 4월 서울패션위크에서 유난히 눈에 띈 컬렉션이 있다. 남성복 브랜드 ‘반달리스트’의 디자이너 양희민(36)의 패션쇼다. ‘시적인 지하세계(Poetic Underground)’라는 주제로 대중음악, 순수미술과 콜라보레이션(협업)한 그는 패션쇼 자체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끌어올렸다.

그의 쇼는 인디밴드 ‘못(MOT)’의 멤버로 최근 5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한 가수 이이언(37)과 지난 2월 ‘공진(Resonance)’이란 주제로 2년 만에 개인전을 연 화가 이이립(35)의 합작품이었다.

“우린 그저 같이 술 마시고 음악 듣고 노는 사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술 협업’에 대해 물었다. ‘콜라보’라는 미명하에 의미 없는 프로젝트가 넘치는 요즘. 뚜렷한 주관과 실험정신으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 3인방의 ‘콜라보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가수 이이언, 화가 이이립과 함께 ‘협업’한 양희민 디자이너의 ‘반달리스트’ 패션쇼는 대중음악, 순수미술이 접목된 또 하나의 문화 콘텐츠다.

▶콜라보레이션…누가 누구와 만나는가= 연세대 출신인 디자이너 양희민과 가수 이이언은 한 살 터울의 친구다. 5년 전 한 잡지사 편집장이 주선한 술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이이언은 4년간 작업해온 미발표곡들을 지난해 10월 디자이너 양희민에게 선뜻 내줬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잘 맞았죠. 음악과 패션에 관한 철학이 통했어요. 그 이후로 편안한 친구로 지내고 있죠. 협업할 때는 냉철한 동료고요.”(양희민)

이이언은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다른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줄 때죠. 이립이가 내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희민이가 디자인을 하는 건 매우 기쁜 일이에요.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쇼와 음악이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렸어요”라고 했다.

“형이 별 생각 없이 응해줬다”고 하지만 같은 철학을 공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이립과 이이언은 형제다. 양희민이 이이언을 만나러 올 때마다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을 수년간 보아온 이이립도 마침내 이번 ‘반달리스트’ 의상에 신작 ‘프래그먼츠’로 참여했다.

“현관에서 늘 희민 형의 긴 부츠와 인사했죠.(하하) ‘아, 패션디자이너가 방문했구나’ 하고 단번에 알 수 있는 멋스러운 신발이었어요.”(이이립)

▶왜 협업하는가…‘나에게 없는 것’을 찾아낸다= 디자이너 양희민이 이이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지난 봄ㆍ여름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그는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읽던 중에 이이언을 떠올렸다고 한다.

“단식만이 유일한 재능인 광대의 모습이랑 지독할 정도로 일관된 음악철학을 가진 이언 형은 닮았어요. 원하는 음 하나를 내기 위해 받은 스트레스로 마른 형을 좀 보세요, 하하. 얼마 전 방송출연 때 ‘초동안’으로 검색어 1위에 올랐다지만…. 제가 하고 싶은 패션 디자인과 컬렉션 쇼를 위해 형 음악이 필요했죠. 저는 도저히 창조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양희민)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일이 협업의 효과라고 한다면, 결국‘콜라보’ 란 ‘나에겐 없으나 남이 가진 재능’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는 대기업의 문화마케팅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현대카드는 ‘슈퍼콘서트’를 통해 해외 가수들의 공연을 주선하고, 신세계백화점은 제프 쿤스의 그림을 사들여 전시회를 연다. 일각에선 거대 자본의 위장술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기업은 종종 문화예술을 넘본다. 

화가 이이립(왼쪽부터), 디자이너 양희민, 가수 이이언.

▶어떻게… 필요가 아닌 ‘신뢰와 존중’으로 협업한다= 이이언은 밴드 ‘못’으로 발표한 2장의 앨범이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과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 모던록 본상을 받을 정도로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몽환적이지만 촘촘한 전자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의 ‘반달리스트’ 의상을 위해 애초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날카로운 인체 형상으로 무의식 세계를 표현해낸 이이립의 그림까지 어우러지며 양희민의 패션 세계는 더욱 깊어졌다.

때론 ‘협업’이라는 프로젝트 아래 눈살 찌푸리는 창작물들도 등장한다. 세계적인 디자인 거장들과 협업해 탄생하는 대기업의 노트북, 냉장고 등은 평가가 엇갈린다. 거대 자본에 종속된 예술가의 용역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기서, 예술가들의 원초적 고민이 시작된다.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다.

이이언과 이이립은 디자이너 양희민과의 협업에 대해 한목소리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했다”고 말한다. 기업과 아티스트, 혹은 브랜드와 브랜드 등 그 주체에 상관없이 협업은 ‘필요’가 아닌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다.

“얼핏 보면 ‘필요’에 의한 만남이죠. 하지만 ‘콜라보’는 서로 없는 부분을 보완해 나가는 거잖아요. 진심이 없으면 시너지는커녕 마이너스일 뿐이죠.”(양희민)

일을 위한 계약관계가 아닌 편안한 친구로, 가족으로 서로를 지켜봐온 이들 세 사람에겐 친밀감이 있었다.

양희민은 또, “처음부터 일로 만났으면, 이렇게 자유롭게 패션쇼를 준비할 수 없었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협업, 그 후에 남겨지는 것들= ‘콜라보’는 보통 곱하기로 표현된다. 더하기 정도로는 가늠할 수 없는 폭발력과 시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양희민뿐만 아니라 제일모직 엠비오의 한상혁 디자이너 컬렉션에서도 음악작업을 함께 했던 이이언은 “정작 가장 가까운 동생과는 함께 일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화가 이이립과의 협업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이립은 중국 베이징(北京) 아트페어 참가와 개인전을 끝내면 형 이이언과 함께 미디어아트 분야로 잠시 외도할 생각이다.

“어릴 때는 그림도 형이 더 잘 그렸어요. 형이 아직도 미술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면 난 음악을 한번 해볼까 해요, 하하.”(이이립)

대학시절 홍대 앞에서 밴드 활동을 하기도 한 음악 마니아 양희민은 협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개인 음반을 낼 계획이다.

“해외에선 패션쇼 컬렉션 음반이 일반화돼 있죠. 음악 선택도 디자인의 일부라는 거죠. 음반에는 제가 직접 만든 쇼 음악이 들어갑니다.”(양희민)

이들의 협업은 실험적이고 신선한 패션쇼란 인상만 남긴 게 아니다. 쇼는 다음 행보에 대한 밑그림이었을 뿐이다. 세 아티스트의 미래는 저마다 남긴 흔적으로 더 다채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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