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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 20명 참교육 실천 대안학교…산청 지리산고 박해성 교장의 삶과 교육
“학비 걱정 없는 학교 만들겠다”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초등학교 자리에 미인가학교로 출발…어려운 아이들 모아 검정고시 준비시켰지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학교 운영에…월급 50만원 시골 학교장 자리 손드는 이 없으니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올 신입생 20명 뽑는데 경쟁률 8대1 이젠 어느 정도 자리 잡아…안철수 원장·정운찬 前총리 등 명사들 한걸음에 달려와 무료특강도

모든 비용 지원받는 학생들, 더 어려운 사람 위해 봉사해야…베풀 줄 아는 우리 아이들 글로벌 리더로 키워내는 게 꿈


지난해 5월. 서울에서 5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경남 산청군 지리산고등학교. 그날 이 학교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공동 주최하는 ‘창의경영학교 워크숍’이 예정돼 있었다.

학교 운동장 한쪽 컨테이너 박스에서 웬 ‘노신사’가 인사를 하겠다며 나왔다. 박해성(57ㆍ사진) 지리산고 교장이었다. 옆에 있던 한 교사는 “교실이 모자라 교장이 교장실을 내주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집무와 기거를 겸하고 있다”고 전했다.

워크숍은 성공적이었다.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 전국에서 왔다”는 100명 남짓의 학생들의 얼굴은 밝았고 눈동자는 열정으로 빛났다. 그들은 강연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고, 신문을 궁금해하면서 기자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진심이 느껴져 고마웠다.

그날 밤. 워크숍이 끝나고 박 교장은 기자와 관계자들이 머물고 있던 지리산 자락 산청유평학생야영수련원에 쳐들어왔다. 그곳은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다.

‘삼장초등학교 유평분교’라는 ‘본명’보다 ‘가랑잎초등학교’라는 ‘애칭’이 더 잘 어울리는, 호젓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밤새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토론하며 어울렸다. 맑은 공기 덕인지 ‘산청 특산’ 막걸리 빈 병은 계속 쌓였다. 하지만 기자는 흑달(黑疸)이 온 듯 흙빛이었던 그의 새까만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지난달. 거의 1년 만에 서울 세종로의 한 식당에서 박 교장을 두 번째로 만났다. 그의 낯빛이 많이 밝아 있었다. “하마터면 다시 못 뵐 뻔했습니다.” 어렵사리 연유를 물었다.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니 간의 90%가량이 농양(膿瘍ㆍ고름)으로 찼다지 뭡니까. 전에 학교 근처 한의원을 갔더니 (간 있는 부위를) 계속 누르더군요. 민간요법이었죠. 그러다 (고름이) 터졌다면…. 끔찍합니다. 다행이지요.”

“왜 간농양에 걸리신 거죠?”라고 물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겠죠. 학비 한푼 안 받고 학교를 운영했으니까요. 사람을 좋아해서 링거 맞다 손님 오면 또 술 마시고, 담배도 꽤 피웠죠.” 박 교장은 치료 후 소주 3병이던 주량을 맥주 1~2컵으로 줄였고,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병마와 스트레스 속에서도 학교와 교육에 대한 열의는 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스승의 날’. 지리산고 학생들이 교정에서 스승인 박해성 교장을 목말 태우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학비 한푼 안 받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무료 특강 강사를 찾아다니고…. 늘 제자들만 생각하는 박 교장. 그렇게 아끼는 제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가장 행복해보인다.       산청=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제자들 돕느라 월급 다 썼던 아버지

지리산고는 가난한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대안교육 특성화고로, 지난 2004년 개교해 2007년 정부 인가를 받았다. 2010, 2011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잠비아 출신 켄트 카마숨바(농경제학과) 씨와 김자정(의예과) 씨를 잇달아 서울대에 합격시키며, 일약 주목받는 고교가 됐다.

이 학교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학생들을 무상으로 가르친다. 수업료는 물론 기숙사비ㆍ책값ㆍ의료비 등의 비용이 일절 들지 않는다. 인가 후 인건비와 운영비 등을 지원받기 시작했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박 교장은 직접 학교를 세운 ‘오너 교장’이기 때문에 운영은 물론, 재정도 신경 써야 한다. 이렇게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리산고를 세우게 된 것은 그의 부친(박상화 전 부산 주례초 교장ㆍ87)의 영향이 컸다.

박상화 씨는 1943년부터 1992년까지 5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서른도 안 된 1952년, 산청 삼장초 교장이 돼 유평분교를 만들었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 도토리를 줍고 싸리 빗자루를 만들어 팔았다.

그렇게 해서 당시(1960년대) 돈으로 100만원가량을 모아 ‘가랑잎 장학회’를 설립, 제자들의 진학을 도왔다. 부산으로 옮긴 후에도 ‘장학금 선행’으로 유명했던 ‘지게 할아버지’ 이석숭(작고) 씨와 ‘지게꾼 장학회’를 만들기도 했다.

박 교장은 “아버지는 제자들 챙기시느라고 집에 월급을 한푼 안 가지고 와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졌다”며 “만날 굶고 다니다 보니 ‘절대 교사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은행 총재가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박 교장의 생각이 바뀐 것은 중학교 때. 그는 “아버지 제자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인이 된 후 선물을 사들고 찾아와 눈물 흘리며 큰절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며 “어려운 학생들에게 배움을 주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이후 박 교장의 꿈은 교사가 됐다. 그는 도서벽지의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 여러 과목을 전공했다. 학부에서는 국어국문학, 대학원에서는 수학교육을 공부했다. 그러나 도서벽지에는 대부분 초등학교만 있어, 그는 1983년 경남 창원 대산중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박 교장의 딸도 지금 고려대에서 가정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다. 딸까지 임용되면 3대째 교사가 나오게 된다.


어느새 걷게 된 아버지와 같은 길

박 교장은 1984년 부산 계성여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실업계고 학생 대부분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박 교장이 담임을 맡았던 학급 학생들도 그랬다. 그가 가정방문을 다니면 감수성 깊은 여고생들은 자신의 가난을 숨기기 바빴다.

가정방문을 갔던 어느 날이었다. 분명히 제자는 하교했는데, 집이 비어 있었다. 2시간째 기다렸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박 교장은 집 앞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제자는 울면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 아이가 뒤에서 보고 있었나 봐요. 3시간을 기다려도 안 가니 할 수 없었겠죠.” 제자는 박 교장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집에는 (선생님에게) 대접할 게 없다”며 울먹였다. 박 교장은 웃으며 “너희 집에는 물도 없니”라고 했다. 제자가 바가지에 가득 떠 온 물을 그는 배가 터지도록 마셨다.

다음날 박 교장은 그 제자를 따로 불렀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를 해봐라”고 했다.

방과 후에 남아서 따로 부족한 과목을 가르쳤다. 반에서 40등 하던 제자는 학기 말 1등으로 성적이 올랐다. 그 제자는 고 3 때 제일 먼저 취업이 결정됐다.

박 교장은 정말 어려운 제자에게는 익명으로 학비를 보태줬다.

“ ‘이 수업료는 내가 잘 아는 분이 너 공부 잘하라고 돕는 거다. 그분을 찾을 필요는 없다. 대신 취업하면 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1000원이라도 도와라’라고 하면서 봉투를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박 교장은 생각했다. ‘만 55세가 되면 명예퇴직해 어려운 아이들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국 박 교장은 이 같은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은 그의 뜻을 따랐고, 생활을 책임지기로 했다. “밥 굶는다”고 싫어했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좌파 학교’로 몰리기도…”

박 교장의 계획은 예정보다 빨리 시작됐다. 우리 나이 마흔여덟이던 2002년. 그의 부친이 교장을 지낸, 폐교가 된 산청 백곡초 자리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미인가 학교를 세웠다. 지리산고 전신인 학림학교다. 이곳에서 그는 어렵고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을 모아 검정고시 준비를 시켰다.

이후 박 교장은 자신의 월급을 모두 학교를 꾸리는 데 쏟아부었다. 주중이면 부산에서 근무를 하고, 주말이면 학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2004년 지리산고 개교와 함께 학교법인 학림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이 됐다.

그러나 월급이 50만원밖에 안 되는 시골 학교장으로 오겠다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부산 생활을 포기하고, 지리산고 교장을 맡기로 했다. 부인은 “월급받으면서 (학교 운영)해라”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5000만원가량 되는 교사 연봉마저 버렸다.

하지만 지리산고를 둘러싼 음해와 우여곡절은 만만치 않았다. 이런 학교가 전국에서 유일한 까닭에 경남 지역 교육계 일부에서는 박 교장의 순수성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제 친구 중 진보 진영 인사가 있다고 학교를 ‘좌파 학교’로 모는 이들도 있었어요. 딱 그 반대인 경우도 겪었고요. 아이들을 위해서는 좌도, 우도 없다는 게 제 평소 지론입니다. 또 애초 지원받기로 한 예산이 깎이기도 하고…. 아, 어려움이 많았네요.”


“받은 만큼 더 베풀어라”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건 고마운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북 임실에 사는 한 지체장애인 후원자는 매달 국가에서 받는 생활비 일부를 쪼개 지리산고에 보낸다. “그분을 찾아갔더니 ‘나중에 내 아이는 꼭 지리산고로 보내고 싶다’고 하더군요. ‘내가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 싶었습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나 정운찬 전 국무총리 같은 명사도 달려와 학생들을 위해 무료 특강을 했다. “이인호 전 주(駐)핀란드대사는 사전 연락 없이 무작정 찾아가 부탁했는데도 흔쾌히 (학교로) 내려와 주셨습니다.”

후원금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버거웠다.

박 교장 부인이 모은, 얼마 안 되는 돈도 상당수가 학교 운영에 들어갔다. 그는 하나뿐인 딸에게 신경 못 쓴 자신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했다. “애 진학 지도도 못 도와줬어요. 고려대 간 것도 나중에 알았죠.”

그러나 이제 가족은 박 교장의 든든한 후원자다. 부인은 지난해 남편의 병치레 후 학교를 부산에서 경남으로 옮기고, 진주로 이사를 왔다. 덕분에 박 교장은 컨테이너 박스가 아닌 집에서 학교로 출퇴근한다. 그는 “딸도 평소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끄러워했다.

박 교장의 노력 덕에 지리산고는 자리를 잡았다. 올해(2012학년도) 신입생 전형 경쟁률은 무려 8대1(20명 모집에 161명 지원)을 넘었다. 그는 “집 나간 아버지가 직업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하는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이 많은데 다 못 받아들인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어렵게 지리산고에 들어간 학생들은 모든 비용을 지원받는 대신, 더 어려운 이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정규 수업인 ‘봉사활동’ 시간을 통해 초등학생 공부 돕기, 독거노인 식사 수발 등의 활동을 한다. 박 교장은 “봉사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알게 되고, 인성도 기를 수 있다”면서 “베풀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이 세계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게 꿈”이라며 웃었다.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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