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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을 예측한 ‘제갈량 父子
한국 기상계 격동기 거친 부친과 미국 유학파 아들…김광식·김영준 부자 그들의 삶
의사 꿈꿨던 소년 김광식 신체검사 불합격에 의과대 포기…
시험삼아 본 만주독립관상기술관 양성소에 덜컥 붙어 제2 인생 시작

1961년 발령 동해 폭풍주의보 기막히게 맞아떨어져…한밤중 정보기관서 찾아와 가슴 철렁했지만 박정희의장 피해예방 도움됐다며 훈장까지

부친 뒤잇는 아들 김영준단장 세계최고 수치예보 모델링 전문가 명성…외국개발 모델만 사용한다면 기상기술 종속화 못 벗어나

장비 국산화 국가안보측면으로도 중요한 과제…한국형 모델활용 정확도 강화땐 명실상부 기상선진국 반열 확신


김광식(88) 전 기후국장은 국내 기상(氣象)계의 산증인이다. 그의 아들 김영준(49) 박사는 현재 기상청 산하 한국형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이하 한수예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 기상계의 박찬호’란 별명을 듣고 있다. 김광식 옹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그의 거주지를 찾은 기자의 손을 부여잡으며 반갑게 맞았다. 그의 곁에선 아들 김 박사가 환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구한말과 광복, 5ㆍ16 쿠데타, 12ㆍ12 사태 등 한국 격동기를 산 김 옹과 미국 유학을 다녀온 ‘기상계의 미래’ 김 단장을 만나 한국 기상계 역사를 돌아봤다.


의사 꿈꿨던 소년 김광식, 기상과 우연한 만남

지난 1925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난 김 옹은 열 살이 되던 해 부친을 급성맹장으로 여의었다. 종조부가 궁중 의사였고 부친의 사망을 지켜본 열 살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일본인 담임의 소개로 일본에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토(京都)의과대학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색약(色弱)이었던 그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을까. 김 옹은 기상과의 평생 인연을 맺게 된다. 실의에 빠졌던 김 옹은 만주국립관상기술관 양성소에 입학하게 됐다. 입학 조건이 일본인으로 제한돼, 그는 이곳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냥 시험 삼아 응시했지만 웬일인지 철썩 붙었다.

이바라키현에서 3개월간 한지(寒地) 적응훈련을 받은 김 옹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해 미군정 아래 목포측후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어 지역 교사로 근무하다 중앙농업기술원(현 농촌진흥청) 기초연구과 기상계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기상 업무를 맡게 됐다. 그런데 농업 기상은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분야였다. 국내에는 관련 서적 한 권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한국전쟁 피난길에 읽었던 일본 보고서 하나에 의존해 겨우 ‘농업기상학’이라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았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이 참 좋다. 아들도 아버지가 그립고 좋다. 부자(父子)는 그렇다. 아버지가 한쪽을 가리키면 아들은 그쪽을 봤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길을 걸었다. 바로‘ 기상’이었다. 김광식 전 기후국장과 그의 아들 김영준 한국형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아버지는 과거 기상계의 거두였다. 아들은‘ 기상계의 박찬호’로 불린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걷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다. 파주 자택에서 부자가 카메라 앞에 섰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박정희 의장도 놀랐던 태풍예보

김 옹은 날씨예보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두 가지를 전했다. 추억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그는 간혹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줘 말했고,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61년 5ㆍ16 쿠데타 이후 강릉소장으로 발령이 난 이듬해 초 대관령에 쌓인 눈은 김 옹의 발을 붙잡았다. 당시엔 철도가 놓이기 전이었기에 서울과 강릉을 오가려면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리거나 1주일에 3번 운항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숙직실에서 새해를 맞게 된 김 옹은 오후 4시 예보 발표를 하게 된다. 당시 일기도에는 타이완 근해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북동진해 제주도 남서쪽 해상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 저기압이 동해로 빠져나오면서 발달할 것으로 예상했던 그는 동해상에 ‘폭풍주의보’를 발표했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사택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김 옹이 잠옷차림으로 밖에 나와 보니 정보기관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고 재촉했다. 김 옹은 “정보기관의 권력이 서슬 퍼런 시대였기 때문에 ‘기관에 불려가면 몸 성하게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했다”고 추억했다. 김 옹을 불러낸 이유는 예보대로 폭풍이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선박 23척이 침몰당했고, 74척이 완파, 99척이 반파됐다. 인명 피해도 잇따랐다.

사망자 35명, 실종자 14명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비록 피해가 컸지만 김 옹의 예보는 유용하게 쓰였다. 더 커질 수 있던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로 인해 김 옹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홍조소성훈장’을 받았다. 또 강원도 관내 경사급 경찰들에게 기상교육을 하는 기회도 잡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81년 9월 초의 일이다. 당시 18호 태풍 ‘애그니스(AGNES)’가 남해상과 대한해협을 지나 동해로 빠져나갔다. 순간최대풍속 35m/s를 기록한 C급 태풍이었던 애그니스는 남해안과 동해안 지방에 많은 비를 뿌렸다. 전남 장흥 지방에는 강우량이 547.4㎜로, 하루 최다 강우량 기록을 갈아치웠다. 사망하거나 실종한 자가 139명에 달했고, 부상자도 58명에 이르렀다. 재산 피해는 1314억원이나 됐다. 당시 미국 태풍분석센터는 태풍이 서해 중부 해상으로 북상해 약화될 것으로 발표했다. 공군기상전대도 동일한 예보를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 관상대 예보국장으로 있던 김 옹은 주변국 예보와는 달리 동해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결과는 김 옹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태풍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많은 자료를 분석하는 것만 못하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들 김영준은 한국 기상계 박찬호별명

 김영준 한수예사업단장은 연세대에서 천문기상학과 물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미국 UCLA대에서 대기과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김 단장은 UCLA 연구교수를 거쳐 미 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NASA/JPL)와 미 해군연구소(NRL) 등에서 전 지구 대기 모델 개발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온, 수치예보 모델링 분야의 전문가다.

김 단장이 참여했던 ‘Quick Scatterometer(QuikSCAT)’ 개발 사업은 NASA 역사상 가장 빠르고 성공적인 임무 수행의 하나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독창적으로 개발한 수치예보기술이 미국 기상청(NCEP) 현업 수치예보 모델, 미 해군연구소 중장기 대기예측 모델, UCLA 대기대순환 모델, 연세대 GRIMs 등에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또 NASA 업적상과 미 해군 공헌상, ‘마르퀴스 후즈 후’ 세계인명사전 3개 부문에 등재된, 명실공히 이 분야 전문가임이 틀림없다.

미국에서 더 유명했던 김 단장이 한국 기상학계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일본과의 인연 때문이다. 김 단장의 학창 시절 지도교수였던 김정우 교수는 김 단장을 86년 자신의 스승인 UCLA 대기과학과의 아키오 아라카와 교수에게 유학을 보냈다. 당시 전지구 수치 모델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아키오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김 단장은 결국 귀국해 한수예사업단장을 맡게 됐다.

UCLA에서 아키오 교수와의 일화 한 토막. 하루는 박사 학위 논문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아키오 교수의 강의 내용 중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아키오 교수를 찾았다. 아키오 교수가 강의한 내용 중에 ‘A=B’라고 설명한 부분이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김 단장의 생각에는 ‘A=C’가 맞았다. 연구실에서 면박을 받고 잘 연구해보라는 말만 듣고 쫓겨났다. 밤새도록 이리저리 생각하고 논리를 개발해 결국 ‘A=B’라는 결론을 들고 다시 연구실을 찾은 김 단장. 의기양양하게 교수님의 방문을 두드린 뒤 “인제야 ‘A=B’라는 것을 이해했다”고 말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키오 교수는 “ ‘A=C’가 맞다”고 하는 것 아닌가. 김 단장은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였다. 아키오 교수는 “과학자는 현재까지 알고 있는 최신 지식과 판단을 토대로 연구해서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어제까지의 결론은 지나간 일이고 현재의 사실만 집중하고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화성 탐사 프로젝트로 알려졌던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일할 당시의 일화다. 김 단장의 역할은 ‘NSCAT’라는 위성에서 나오는 해상풍 탐지자료를 기상학적 모델들을 사용해 분석하고, 위성 탑재 레이더 탐사장비의 설계에 반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JPL 출근 첫날 NSCAT의 탐지장치가 고장이 났다. 예전의 계획이 백지화되고 NSCAT를 대치할 새로운 레이더와 위성을 급하게 설계 제작하는 일에 투입됐다. 그것이 ‘QuikSCAT’ 프로젝트였다. 기상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인 레이더도 연구해야 하는 프로젝트였고, 김 단장은 계획에 없던 위성자료 분석과 처리를 위한 시스템 개발을 주로 하게 됐다.



수치예보 모델의 국산화를 꿈꾸다

최신 기상계 동향을 이들 부자 얘기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수치예보(NWPㆍNumerical Weather Prediction)’는 미래의 대기 상태를 예측하는 기술로, 수학과 기상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김 단장은 “수치예보는 컴퓨터를 이용해 대기의 현재 상태로부터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서 우선 대기를 지배하는 물리 현상들을 설명하는 법칙을 알아내고 방정식으로 표현한다. 그 식이 불완전한 데다가 너무 복잡해 그 해(解)를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근사적으로 풀어낸다. 또 미래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 위성 등 각종 장치를 이용해 얻은 현재 기상자료를 입력해야 한다.

현재까지 한국은 일본형을 사용하다 최근 영국에서 개발된 수치예보 모델을 현업에서 활용하고 있다. 김 단장은 “이렇게 계속 외국에서 개발된 모델을 사용한다면 기상기술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미래에 기상선진국들이 기술 협력을 더는 해주지 않을 경우 국내 기상예보도 자체적으로 할 수 없고, 많은 비용을 들여 기술을 사와야 하게 될 것”이라고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분단국인 한국에서 국가안보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럼 이 사업으로 얻을 수 있는 사업이 뭘까.

김 단장은 우선 ‘수치예보 모델의 국산화’를 꼽았다. 현재 한국 기상예보 정확도는 세계 6위 수준이다. 그러나 이는 외국의 기술을 빌린 결과다.

김 단장은 “한국 자동차산업도 과거에는 다른 나라의 기술을 많이 빌려 썼지만, 이제는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죠”라며 “가장 핵심 부품인 자동차 엔진도 직접 만들고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고 투자해 기술을 개발하고 국산화율을 높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비유를 들었다. 김 단장은 자체 기술로 만든 한국형 수치예보 모델을 활용해 기상정확도를 높인다면 명실상부한 기상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업의 다른 목표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 모델을 개발하고 시험하기 위해선 기상청에서 사용하고 있는 현업 환경과 유사한 연구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국내 대학에서 이러한 연구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김 단장은 “사업단 설립으로 이러한 환경이 구축됐고, 한국형 수치예보 모델의 개발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수치예보 모델링 분야의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도 갖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3代 잇는 기상학 가족 나올까…

김 박사의 부친인 김 옹은 기상청(당시 중앙관상대, 후에 기상대로 개명)에서 말단 예보관으로 출발해 예보국장, 기상연구소장, 기후국장 등을 역임했다. 또 한국기상학회장을 역임하며 많은 대학에서 장기간 교편을 잡고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어릴 때부터 부친이 책 쓰는 모습을 보고 자란 김 단장은 이따금 한글맞춤법의 교정 작업을 돕기도 하며 기상학이라는 분야와 친숙해졌다. 결국 기상학을 전공하고 2대째 기상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김 단장의 외아들인 지섭 씨도 지난해부터 공학(기계공학, UC버클리대)을 전공하고 있다. 기상학 전공은 아니지만 기계공학자들이 기상학에서 많이 다루는 유체역학을 연구하기 때문에 나중에 기상학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 단장은 “아들도 기상학계에 종사하면 집안에서 3대를 이어 기상학자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들도 동종 학계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세상은 변했고, 기상계도 변했다. 김 옹과 김 단장이 업무를 보던 방식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거쳤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옹은 “지금 기술 수준과 비교하면 한 마디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해당할까. 팩스로 수신된 기상자료를 도면에 손으로 그리고 기압 패턴을 중심으로 기류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과거의 경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예보를 내곤 했다”고 회상했다. 날씨계의 유명인사였던 김동완 전 통보관이 TV에서 기압 패턴을 그리면서 설명하는 일기예보가 당시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반면 아들인 김 단장은 현대 지식, 기술과 장비를 사용해 예보를 내는 시대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도구인 수치예보 모델을 개발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다. 최첨단 기기와 컴퓨터가 동원된 예보 모델은 점차 정확도를 높여가고 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부자에게는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기후 변화를 읽고자 하는 열정과 집요함이다. 백발이 성성한 김 옹 한쪽에 다소곳이 앉은 김 단장은 김 옹을 빼닮았다. 단순히 부자지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모자란다. ‘한국 기상계의 발전’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열혈남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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