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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 ‘튀기’...”라 불렀던 대한민국...이제는 서로 공존ㆍ공감하죠
[헤럴드경제= 박병국ㆍ정진영ㆍ서지혜 기자] 다(多) 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6ㆍ25 전후(戰後) 출생한 혼혈인들은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후 출생한 혼혈인들은 과거 ‘다문화’라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기 전 대한민국 사회에서 차별ㆍ억압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당연히 대한민국 주류 사회에 포함되지 못한 채 이들 전후 세대 혼혈인들은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리핀 출신 이민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중국은 물론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 다양한 민족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유입돼 다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00만 외국인 시대다. 정부에서도 다문화 사회에 대한 지원을 늘려 나가고 있다.

다만 전후 세대 혼혈인들은 과거 대한민국을 보면 당혹스럽다고 말하면서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보면 희망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 같이 생긴 자식 낳아 차별받게 하기 싫어 불임 수술까지 했어요.”

배기철(55)씨는 자신을 ‘57년생 부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다만 그는 백인계 혼혈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이름 모를 미군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그리고 배씨가 태어났다. 집안에서 쫓겨난 배씨 그리고 배씨의 어머니.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비극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1세대 혼혈인들이 고아원 신세를 지거나 입양됐죠. 다행히 어머니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배씨는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만 취직의 문턱에서 혼혈이라는 차별의 장벽은 굳건했다.

“취직이 어려웠죠. 졸업 후 밤무대에서 드럼 연주자로 오래 일했습니다.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연예계 등으로 한정돼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군대에 정말 가고 싶었죠.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었는데… 그러나 군은 신체검사에서 내 외모만 보고 입대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국가는 내게 아무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사랑에 실패한 뒤 불임수술을 받았습니다. 나 같이 차별을 받는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받았던 차별 때문이었을까. 그는 눈물 조차 흘리지 못했다.

혼혈인 단체인 국제가족한국총연합이 파악하고 있는 한국전 혼혈인 546명 중 면접조사한 333명 중 150여명만이 취업을 한 상태였다. 이중 사무직에서 일하는 사람은 9.5%에 불과 했다. 나머지는 전부 식당 주방청소, 건설노동자, 유흥업소 접대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교육수준도 높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은 25.38%. 초등학교 졸업은 11.92%, 중졸 이하는 15.77%, 고졸 이하는 32.69%였다.

“차별을 피해 떠났지만 어머니가 눈에 밟혀서 한국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요.”

1947년에 태어난 강필국(65ㆍ호프집운영ㆍ단역배우)씨는 유년기를 서울 영등포에서 보냈다. 친부는 미군으로 추정되나 누군지 알 길이 없다. 시댁에서 쫓겨난 친모는 그를 고아원에 버렸다. 양부모는 그를 아꼈다. 동네 사람들은 모든 말썽과 원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손가락질이 그에게 향했다.

“차별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더해갔고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0년대엔 미제타도를 외치는 대학생 데모대에게 맞아 치아 16개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늘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취업 원서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밤무대에서 드럼을 치고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해 입에 풀칠을 했다. 한국에서 벌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미국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인간에 대한 차별이 강씨의 아이들에게도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강씨는 지난 1999년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키워주신 부모님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배씨와 강씨처럼 전후에 태어난 혼혈인들이 차별속에서 유령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지난 90년대 이후 국내 거주 외국인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 최근에는 100만명 시대가 됐다.

당연히 ‘혼혈’이라는 차별적 단어보다 다문화라는 포용의 단어가 쓰이고 있다.

이들 혼혈인들은 과거에는 차별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포용을 통해 희망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 강서구 암사동에서 만난 이명호(58ㆍ퀵서비스)씨는 “예전에는 사람많은 길을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튀기’,‘아이노코’하면서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지나가면 쳐다보지도 않아요.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어요”라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도 계속 늘고 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200개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확대 설치됐다. 부모의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다문화 아동(혼혈인)의 보육료도 전부 지원되고 있다. 정부는 다문화가족 자녀의 교과 학습지도 등을 위한 거점 학교수도 3년새, 35개학교를 늘려 전국에 80개에 이른다.

“친구들이 피부색이 다르다고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요. 반 여자아이들이랑 다 친한데 수연이랑 특히 친해요.”

한국인 아버지, 키르키스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리나 양의 말이다.

카리나 양은 “학교에서 차별은 전혀 없어요. 친한 친구들이 있고 예쁜 경치를 가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c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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