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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동·50·년…어~ 그 목소리
1964년 대학 3학년 때 ‘ 기적처럼’ TBC 성우로 데뷔 내년이면 햇수로 벌써 50년…학비나 벌어보고자 한 일이 천직이 되어버린 셈

TBC 구조조정에 아내도 잘리고 열받아 사직서…동아방송으로 옮겨 ‘정계야화’로 정치드라마와 첫 인연 맺어

1981년 ‘제1공화국’ 부터 ‘제3공화국’까지 본격 TV정치 드라마서 맹활약…‘남색’있는 음성으로 시청자 사로잡았지

라디오 ‘격동시리즈’로 내 목소리 확실하게 청취자들에 각인…요즘엔 MBC ‘무신’으로 복귀 단 1분 해설 위해 대본 전체 읽느라 고생 좀 하지


‘말은 곧 사람의 됨됨이고, 세상 그 자체’라 했다. 욕설과 비하, 온갖 막말이 뒤섞인 세상. ‘스타화’의 지름길로 보이던 막말이 거꾸로 화자(話者)를 나락으로 밀어뜨리고 이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말조차 정도(正道)를 벗어나 또 다른 생채기를 내는 게 요즘 세태다.

성우 김종성(69) 씨를 만나러 간 날은 더욱 그랬다. 총선 하루 전인 지난 10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서울 여의도는 한 국회의원 후보자의 막말 여운이 짙었다. KBS 건너편 한 빌딩에 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만난 김 씨는 “뭐 재밌는 얘기가 있다고…”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청량감 있는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온다.

‘격동 50년’ ‘제3공화국’ 등 라디오와 텔레비전 정치드라마의 명해설자이지만, 일상의 목소리는 케이블TV의 코미디 ‘롤러코스터’에 가깝다. “그냥 말할 땐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죠.” 친근하고 구수하고 느린 어조다. KBS ‘스펀지’, MBC 사극 ‘무신’, 엠넷(mnet)의 ‘슈퍼스타K’의 해설이 한목소리란 게 믿기 어렵다. 더구나 목소리 주인의 나이가 칠순이라니. ‘슈퍼스타K’나 ‘롤러코스터’는 10ㆍ20대가 즐겨보는, 케이블TV에서도 소위 가장 ‘잘나가는’ 프로그램들 아닌가. 그만큼 프로그램 무게를 잡는 중량감 있는 목소리로는 독보적이란 얘기다.

▶20년 만에 MBC 드라마 복귀= 요즘 그의 목소리를 고려시대 무사의 삶을 다룬 MBC 주말사극 ‘무신’에서 만날 수 있다. MBC 드라마 해설 복귀는 1993년 ‘제3공화국’ 이후 약 20년 만이다. 마침 기자가 만난 날은 20회 녹화날이었다. 해설은 전체 70분 가운데 고작 1분~1분30초, 원고지 1~3장 분량에 지나지 않는데, 그 회 전체 대본이 책상에 놓여 있다. 고3 수험생 참고서처럼 해설에는 밑줄과 빗금이 빽빽하다.

“대개는 자기 분량만 읽고 마는데, 저는 대본을 다 읽어요. 그래서 연출자가 시간 없다고 신경질도 내죠. 그래도 시간을 달라고 해요. 해설자는 드라마 속에 들어가 혼연일체가 돼야 해요. 해설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감정이 완전히 천지차이거든요.”

예컨대 장군이 죽는데, 다음 장면에서 봄비가 조용히 내린다면 해설도 조용히 사라지듯 끝나야 하고, 전쟁 장면이라면 힘줘 딱 “~했다!”고 마친다. ‘그러나’로 이어질 때도 4분의 1박자, 2분의 1박자, 엇박자 등 떼는 간격을 미리 계산한다.

김 씨는 “해설도 음악”이라 했다.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듯 해설 역시 어투ㆍ톤ㆍ박자ㆍ음성 등의 높낮이에 따라 전하는 감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좋은 해설은 장황한 극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시청자의 이해를 높일 뿐 아니라 감정까지 고조시킨다. 김 씨는 ‘무신’ 이환경 작가의 전작 ‘연개소문’에서는 해설이 마뜩찮을 땐 직접 고쳐놓기도 했단다. 젊은 시절 2000장 분량의 라디오드라마를 써서 PD를 쫓아다니던 문학청년의 기질이 꿈틀대서였다.

“얼마 전 만난 시각장애인이 내 손을 꼭 잡고선 ‘옛날에 잘 들었다’면서 내 출연작품을 줄줄이 외워요. ‘아, 이젠 이 양반들이 팬이구나!’ 했죠.” 개인 녹음실에서 마이크에 앞에 앉은 김종성 씨는 성우의 입지가 전만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노인을 위해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를 오디오북으로 꼭 제작하고픈 새로운 도전이 생겼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대학 3학년 시절 기적같이 붙은 TBC 성우 1기= 김 씨는 1964년 데뷔해 내년이면 햇수로 50년을 맞는다. 동국대 국문과 62학번. 대학생 때 학비를 벌어보고자 뛰어든 일이 평생의 천직이 됐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MBC에 백민 PD라고 계셨는데 종로5가 성우학원에서 강사를 하시더라고요. 내가 자꾸 따라다니니까 학원 옆에 ‘아방궁’이란 다방으로 몇 날 며칠에 와라 하셨죠. 거기서 원고를 전해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읽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라디오드라마 공모전에도 여러 번 참가했지만 작가의 길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 상금이 100만원, 30만원 이랬는데 후암동에 집 한 채가 30만원도 안 될 때였어요. 당첨되면 집안이 일어났어요. 백민 선생이 ‘너는 작가 하지 말고 성우 해라’라고 한 게 계기가 됐죠.”

1963년 동아방송 성우 모집에서 1차 탈락했다. 서울 필동 동국대 뒷길을 따라 남산에 올라 셰익스피어 전집 7권을 소리 내 연습했다. 이듬해 4월 TBC 성우 1기 모집에 “기적같이” 붙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면접을 본 연출가 고(故) 이보라 선생은 “네 목소리엔 ‘남색’이 있어”라고 평가했단다.

1978년 옛 중앙정보부의 방송인 산업시찰에서 MBC 라디오드라마 ‘그림자’ 팀과 함께 울산
현대중공업 현장에서. 왼쪽부터 유열 작가, 김성욱 PD, 김종성 씨.

첫 출연작은 고(故) 한운사 작가의 ‘대학가의 건달들’. 시인 김지하 등 서울대 ‘반골’ 학생들의 삶을 모티브로 한 TBC의 첫 라디오드라마다. 비중 있는 단역, ‘서울대의 서무주임’을 맡았다.

생업전선에 뛰어든 탓에 대학은 5년 만에 졸업했다. 소설가 조정래, 시인 박재천, 홍신선이 그의 대학 동기다. “방송국은 요령껏 몰래 다녔죠. 걔들이 대신 리포트를 많이 써줬죠. 나는 가필(加筆)하니까, 걔들은 80점, 나는 85점 맞고. 지금도 만나면 그 얘기를 하죠.”


1990년 2월 MBC‘ 동물의 세계’를 녹음 중인 김종성 씨.

▶라디오를 끼고 사셨던 아버지, 라디오드라마가 가장 큰 효도= 처음 2년여 동안은 성우활동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문학청년으로서 성우란 직업이 떳떳지 않게 여겨졌다. 본명 김기홍 대신 아명 ‘종성(宗聖)’을 쓴 이유다.

목소리의 ‘끼’는 핏줄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충북 공주군 신풍면 출신인 그의 부친은 마을에서 ‘시조선생’으로도 불렸다. “성량이 좋아서 여기저기 자주 불려다니셨어요. 사랑채에서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 읊는 소리가 들렸죠. 요즘 성우나 다름없죠. 아버지가 오래 앓으셨는데 라디오에 아들이 나오니까 라디오만 끼고 사시는 거예요. 효도라면 그게 효도였죠.”

3녀2남 중 장남인 그와 다섯 살 차이 나는 막내는 MBC FM ‘두시의 데이트’를 22년간 진행한 ‘라디오스타’ 김기덕이다. “내가 라디오드라마할 때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분명히 내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본인은 그런 생각 꿈에도 안 하겠지만.”

그는 ‘기덕’이란 이름에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동생이 아명 ‘종원’으로 불렸던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시주 쌀을 받으러 온 한 스님이 ‘기덕’이 이광수(소설가)보다 더 유명해질 이름이라고 했다는 것. 아명 ‘종란’으로 불렸던 셋째 누님 역시 신상옥 감독이 연기를 시키려고 했을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다고.

1980년 방송통폐합 때문에 동아방송 라디오 정치드라마 ‘정계야화’는 끝이 났다. 안타까운 종영을 기린 기념패.

▶복덕방을 할 때도 끊을 수 없던 성우의 재미= 그의 인생에서 정치드라마를 빼놓을 수 없다.

TBC가 공채 1기 성우 15명 중 8명을 구조조정 대상(그 속엔 현재의 아내도 포함돼 있었다)으로 추리자, 분기탱천했던 그는 1969년 TBC를 관뒀다. 때마침 동아방송의 안평선 PD가 불러 고(故) 김기팔 작가의 ‘정계야화’에서 해설을 맡게 된다. 정치드라마의 효시가 된 기록적 작품이다. 시대정신을 일깨우고자 한 ‘애국지사’ 풍류가 지식인을 휘감던 시기다. 그는 동아 광고 사태로 인해 해직돼 1976~79년 잠실에서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생활고로부터 정신을 무장시킬 수 있던 시기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온 뒤 MBC 김상욱 PD가 ‘그림자’ 해설을 맡아 달라고 복덕방으로 전화를 걸어왔죠. 처음엔 ‘지겹다’고 안 한다고 했는데, 3개월을 기다리는 거예요. 사실 복덕방에서도 성우 일이 머릿속에서 잠시도 안 떠났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니 사업이 잘될 리도 없고.”

복귀하면서 다시 시작한 ‘정계야화(政界夜話)’는 방송 통폐합과 함께 곧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고(故) 김 작가가 1981년 MBC에서 쓴 TV드라마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의 해설을 맡았고, 라디오 ‘격동 시리즈’로는 2007년 마이크를 내려놓기까지 19년간 해설자로서 전 국민의 귓가를 맴돌았다. 단일 프로그램 해설자로선 최장 기록이다.

그는 인터넷라디오 ‘나는 꼼수다’의 정치 풍자를 아들의 추천으로 접했다. 신선했다. 우리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층이 의심이 풀리지 않은 사건을 대놓고 얘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했다.

그러나 막말과 잡담의 난무, 떠들썩한 분위기의 TV 예능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아무리 ‘시대의 변화’라고 한 발 양보해도, 최소한 지켜야 할 품위를 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어투가 문제죠. 비아냥이나 윽박지르는 말투는 앞에서는 웃길지 몰라도 뒤에선 상처가 돼 결국 자신이 다칠 수 있는 거예요. 덕성스러운 말투로도 얼마든지 풍자와 비판의 내용을 담을 수 있거든요. 여유 있고 품위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방송인의 책임이 있는 거죠.”

외화 더빙은 자막이, 다큐멘터리 해설은 인기 연예인이 대신하며 성우의 설 자리도 좁아졌다. 시대 변화에도 그가 50년 가까이 외길을 걸을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원칙과 철학이 확고하기 때문인 줄도 모른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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