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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기준영의 ‘와일드 펀치’…홍상수식 소설
제5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기준영의 ‘와일드 펀치’는 홍상수 감독식 영화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소소한 일상과 우연으로 짜인 리얼리즘은 극적 긴장감과는 거리가 있다. 서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인물들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을 연기해낼 뿐이다.

소설은 중산층 부부 강수와 현자의 결혼기념일에 강수의 친한 동생 태경과 현자의 어린 시절 의자매 미라가 찾아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부의 일상이 흔들릴 법하지만 변화는 없다. 이들은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무덤덤하다. 거실로 방으로 흩어졌다 모이고 대화를 나누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TV 오락물을 함께 앉아 보지만 웃진 않는다. “화면 너머 거실 벽 안쪽의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본문 중)

이들은 저마다 가족의 상실, 이혼과 상처를 안고 있다. 하지만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난 잃어버린 걸 정말로 잃어버리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는 미라의 중얼거림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태도를 관통한다. 현실에 대한 불안이나 염려는 없다. 이들의 말과 몸짓은 가볍다. 자신의 상처에 몰입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픔에 거리를 둠으로써 다른 사람의 상실과 아픔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

네 사람의 관계도는 미라와 고등학교를 자퇴한 우영의 만남으로 한 단계 확장된다. 집을 나간 아버지, 나이 어린 애인을 집으로 끌어들여 생활하는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며 배달일을 하는 우영은 매 맞는 여자 미라를 알게 된다. 주민센터 5층 체력단련실에서 낡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반대편 빌라를 들여다보다 발견한 것이다. 남자가 미라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체력단련실에는 ‘난 괜찮아’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가 울린다. 우영은 생각한다. “그냥 괜찮은 삶은 없다”고. 우영의 자기인식은 통렬하면서도 쿨하다. 


“이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아버지. 아마도 우영은 이런 소파 위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소파에 길게 누워 거짓말을 하던 아버지, 그리고 아마도 우영은 이 소파 위에서 자기 첫 몽정을 소스라쳐했던 것 같다. 이 소파 위에 다시 길게 누워 있던 다른 남자들. 아마도 우영은 사는 게 다소 좆 같지만 다들 참고 사는 기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던 것 같다.”(본문 중)

우영과 엄마, 모자가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은 ‘세상에 이런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것. 이는 둘에게 위안이 된다.

소설은 누군가의 삶의 한 토막을 잘라 편집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듯 폭력적 상황도 무심하게 처리해 나간다. 이 특별하지 않음을 작가는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얘기로 품는다. 틀에 박힌 가족, 연애, 성장 서사 대신 대안의 가능태들을 담아낸것이다.

강수와 현자의 이층집은 그런 가능태의 가시화다. 상실과 아픔의 공간이지만 회복과 치유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집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안식처가 된다.

문학평론가 백지연 씨는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축적되는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그것이 열어가는 관계성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점에서 ‘와일드 펀치’는 신뢰와 미덕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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