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영화전공했냐고요? 난 商高 나온 남자”
‘도가니’‘러브픽션’ 제작자로 유명세…엄용훈 삼거리 픽쳐스 대표
초등생때부터 공사판 경험
가정형편 어려워 대학 꿈도 못꿔

상장사 재무담당으로 10년
투자컨설팅 하며 또 10년…

“창의적인 일하자” 영화계 진출
다음 작품은 이주여성 다룬 코미디


‘도가니’와 ‘러브픽션’, 단 두 편으로 한국 영화계의 주목받는 제작자로 떠오른 삼거리픽쳐스의 엄용훈(46) 대표는 요새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젊은이들의 질문으로 유명세를 실감하곤 한다. 그중에는 “저는 영화전공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오지도못했는데요,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오는 친구들도 있다. 

그때마다 엄 대표의 답은 짧다. 
“저는 고졸이거든요.”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다. “허걱”이거나 “더 존경하게 됐다”거나. 엄 대표는 “영화계에선 저를 당연히 연극영화과나 명문대 출신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며 “제게 직접 묻지 않는 한 굳이 학벌을 밝히진 않았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약 30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를 줄세우려는 사람들이 무슨 학교에서 어떤 전공을 했냐고 물어 ‘상고 졸업했다’고 답하면 예의 대화가 끊기거나 다른 화제로 돌리곤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엄 대표의 말이다.

사회적 영향을 크게 끼친 웰메이드 영화의 제작과 흥행의 비결, 살아온 내력이 궁금해 찾아간 서울 신당동 삼거리픽쳐스의 엄 대표 사무실 칠판엔 차기작의 준비상황과 함께 ‘똑같은 논리와 전략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이 ‘성공의 복수’’ ‘우물의 깊이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포기했느냐 포기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하다’ 등의 결의가 적혀 있다.

엄 대표는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영화계에서도 ‘비주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4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빌딩 청소나 식당일을 하시는 어머니께만 의지하기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은 꿈꾸지도 못하고 경기상고에 진학해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공사현장 짐지게를 져본 엄 대표는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해외 운송회사 통관업무로 시작해 상장사 재무 담당으로 10여년을 보냈다. “진급 심사에서 1등을 하고도 학력 때문에 번번이 미끄러지자 임원들이 ‘등록금은 댈 테니 어디서라도 졸업장을 따오라’고도 했지만 돈으로 학력을 사기 싫어 거부했다”고 말한 엄 대표는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 지금 방통대 경제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엄 대표는 ‘인생 매 10년마다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결심으로 90년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던 중 벤처 열풍이 불었고 지인들의 부름으로 투자컨설팅업에 합류했다. “다양한 업종과 회사들, 사람들을 경험했고 수많은 ‘한방 인생’과 달고 쓴 곡절들을 목격했다”고 떠올렸다. 

투자결정과 인수ㆍ합병 등의 업무를 통해 한때 상상키도 어려운 고액 수입을 올릴 때도 있었지만 “쉽게 벌고 다시 투자해 결국은 남는 게 없는 게 그 업계”라고 할 만큼 금융, 투자업이라는 게 휘발성이 강했다. 그래서 세 번째 10년은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영화 도가니와 러브픽션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는“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자취를 남기는 창의적인 일을 하자”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계기로 영화인생을 살게 됐다고 말한다.                  이상섭 기자/batong@heraldcorp.com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자취를 남기는 일을 하자는 생각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내 역할은 무엇일까,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라는 질문이 화두였다. 인생의 방향타는 예기치 않게 영화로 흘렀다. 투자컨설팅의 고객이었던 영화사가 인연이 돼 2000년대 중반 LJ필름과 프라임엔터테인먼트로 자리를 옮겼고, 2008년 제작사 삼거리픽쳐스를 차려 독립했다. 그러던 차에 공지영의 ‘도가니’를 만났고 ‘러브픽션’의 전계수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사실상 창립작으로 준비했던 ‘러브픽션’의 투자가 난항을 겪으면서 3년여간 표류하자 엄 대표는 37개월간 아내와 3남매를 월세 단칸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아내가 전세자금으로 마련한 돈을 원작 판권료로 지불하며 영화사의 라인업을 늘려갔다.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나 “아빠, 영화 안하면 안돼? 왜 우리 가족은 점점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 좋아져?”라고 했던 아이들에겐 늘 미안하고 고맙다. 

엄 대표는 ‘도가니’나 새로운 연애담으로 호평받은 ‘러브픽션’ 등 작품과 개인철학, 영화사의 색깔을 관통하는 것은 ‘반권위주의’와 영화의 사회적 가치라고 말했다. 

벌써 5~6편의 차기작들을 기획 중인 엄 대표의 수중엔 이주 여성들의 한국살이를 담은 경쾌한 코미디 ‘나는 한국인이다’와 한 가족의 눈물겨운 불황 극복기를 다룬 영화 시나리오가 들어있다. 

인터뷰 말미에 팬과 관객들이 줬다며 ‘도가니’라고 부조된 와인 한병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엄 대표의 웃음이 밝았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