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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밭의 이브,꽃속의 이브..이숙자의 색채여정
< 이영란 기자의 아트 & 아트 >

화가 이숙자(70, 前고려대 교수)는 보리를 그린다. 또 보리밭과 여성누드를 결합시키기도 한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작품전을 꾸렸다.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온 이숙자 화백이 ’이숙자의 색채 여정(Lee Sook-Ja :Colorful Journey)’이란 타이틀로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 갖는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오는 4월1일까지, 부산 해운대의 가나아트부산에서는 4월4~17일에 전시를 연다. 이번 개인전은 작가의 스물다섯번째 개인전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40년 남짓 보리를 그려온 이숙자는 그러나 서울 출신이다. 그것도 서울 사(四)대문 안 토박이다. 종로구 운형궁 옆, 익선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숙명여중, 서울사범, 홍익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리밭, 황소, 백두산을 그렸다. 서울 토박이치곤 의외의 작업이다.


이숙자가 보리밭을 처음 만난 건 10살 무렵. 6.25전쟁으로 부친의 고향 충북 옥천으로 피난을 갔던 그는 옥천 암곶말에서 온천지가 초록빛으로 넘실대는 보리밭을 생전 처음 맞닥뜨렸다. 그것은 엄청난 쇼크였고 환상적인 시각체험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 장남과 결혼해 바삐 사느라 옥천의 보리밭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신혼초 뒷바라지했던 시동생이 교사로 취직하며 얻은 경기도 포천의 자취집을 찾은 이숙자는 보리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털털거리는 시외버스에서 내려,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아끌며 힘들게 산등성에 오르니 장대하게 펼쳐진 삼천여평의 보리밭이 한 눈에 들어왔다. 넘실넘실 춤추는 푸르디 푸른 보리이삭 위로, 나비들이 날아드는 모습에 넋을 빼앗긴 그는 이후 어떻게 보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않는다고 했다. 


이튿날부터 이숙자는 여름 내내 포천 보리밭을 찾아 진종일 보리 스케치에 빠져들었다. 그의 섬세한 감수성에 의해 건져올려진 ‘보리’라는 소재는 한국화의 새로운 표현대상으로 자리잡게 됐다. 그 무렵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양이 아직 열기를 뿜기 전인 6월 초순이면 나의 보리밭 스케치여행이 시작된다. 배낭에 간단한 화구만 챙겨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간다. 낡고 굉음이 요란한 직행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여쯤 달리면 드넓은 보리밭이 눈에 들어온다. 들판에 펼쳐진 청맥(靑麥)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숨이 멎을 것같다. 실바람 한점 불지않은 태양 아래 적막한 보리밭에선 소름끼치도록 요기스런 초록빛 공기가 감돈다.”



작가는 보리가 익어가면서 알맹이가 톡톡 불거질 때면 생명의 경이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 보리밭을 그럴 때면 단단하게 감겨진 실타래같은, 가슴 속 응어리가 스르르 풀려나가는 것같다고 했다. 그는 보리들이 모두 똑같은 것 같지만 겨울의 보리, 봄의 보리, 수확을 앞둔 보리는 제각기 다르다고 했다. 특히 6월하순 황맥으로 변해 수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 ‘잘 생긴 젊은 왕자가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해’ 저절로 붓을 들게 된다고 했다.

물론 평생동안 ‘보리밭 작가’로만 규정되는 게 너무 싫고, 보리알 보리수염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그리는 보리그림이 너무도 힘들어 다른 실험도 해봤다. 황소도 그려봤고, 인물화도 그렸으며 소나무며 꽃도 무수히 그렸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보리 그림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는 "이젠 보리밭을 그리게 된 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되뇐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보리 수염 한올한올, 보리알 하나하나에 개성을 불어넣고, 기를 불어넣다 보면 육체의 피곤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순간 쾌감의 극치를 느낀다고 했다.

이숙자는 데뷔초에는 민예품이며 고가구,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박생광 천경자 등 여러 스승에게 사사하며 정물화 동물화 인물화를 꾸준히 연마했다. 백두산 천지에 매료돼 가로 14m가 넘는 초대형 작품 ‘백두산’도 그렸다. 또 황소를 소재로 한 과감한 추상작업도 시도했다. 그러나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보리밭 그림이다. 1970년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보리밭’은 이제 그의 이름과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다. 그는 싱그런 초록에서부터 눈부신 황금색, 원숙한 은색과 보라색까지 자연의 빛깔이 모두 담긴 보리밭을 탄탄한 구도와 원숙한 필력으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다. 



이숙자는 돌과 보석가루를 아교에 섞어 화폭에 바르는 암채(岩彩)기법으로 보리알을 입체적으로 채색한다. 값이 비싼 전통 석채안료만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 보리 이삭과 수염들은 화면밖으로 뛰쳐나올 듯 광채를 발한다. 보리 알 하나하나의 입체감을 살리기위해 올록한 부조기법을 전통 채색화에 도입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때문에 서양그림에선 느낄 수 없는 생생함과 정교함이 느껴진다.
또 바람에 살랑이는 보리이삭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찬란한 슬픔의 서정을 간직한채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을 아득하게 파고든다.

"보리밭 회화에선 보리수염의 표현이 중요하다. 눈에 띄게 굵게 그어진 수염은 세필로 반을 쪼개고, 하얀색 수염이 우연히 두개가 나란히 그어져 있으면 그중 한개 수염은 다른 색으로 바꾸곤 한다. 또 속도감이 약해서 수염의 기(氣)가 살지 않는 수염은 다시 살리기도 한다. 극세필로 비단결처럼 섬세하게 그릴 때도 있고, 힘차고 굵게 다아나믹한 수염을 그릴 때도 있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연두 청록 초록 백록 흰색 등등, 이런 색들로 수염의 굵기에 변화를 주며 그리노라면 어느새 초록빛 안개가 서린 듯한 보리밭 작품이 완성된다"고 작가는 밝혔다. 보리수염을 그리다 보면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라고 했다. 팔이 끊어질 듯 아파 압박붕대를 감고 작업한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즘 이숙자는 여성누드 작업에 푹 빠져 지낸다. 눈부시게 아름답게 핀 양란 등 꽃 사이로 여성의 누드를 곁들인다. 공들여 보리수염을 그리듯 여성 나신의 체모와 머리카락을 한올씩 섬세하게 그려가며 또다른 회화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이숙자는 싱그러운 초록빛 물결부터 황금빛, 은빛, 보랏빛 물결까지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다양한 보리밭 그림을 내놓았다. 순지를 다섯 겹씩 덧대 만든 캔버스에 에메랄드, 수정 같은 보석 원석을 갈아만든 석채(암채)로 그린 보리그림은 차분하고도 명징한 빛을 발한다.
또 싱그런 보리밭과 뇌쇄적인 여성누드를 결합시킨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도 다양하게 나왔다. 커다란 눈의 서구형 미인들이 보리밭에서 도발적인 포즈를 취한채 정면을 응시하는 작품들은 매우 파격적이다. 이와함께 화려한 서양란 등을 배경으로 한 신작 여성누드 ‘이브-봄 축제’ 시리즈도 선보였다 .

그는 "칠순에 접어드니 체력이 예전같지 않아 누드화 작업에 비중을 더 두고 있다"며 “특히 꽃그림은 가장 자신있는 그림이라 즐겁게 작업한다"고 했다. 이어 "싱그런 생명력을 지닌 꽃과 꽃처럼 아름다운 이브를 보며 많은 이들이 생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닫이, 십장생도 등을 그린 초기작품과 ‘보리밭’ 연작, ‘이브’ 연작, 그리고 최근작까지 총 40점의 회화와 크로키 30여점이 걸린 이번 전시는 자연의 숨결이 담긴 한국적 색채를 찾아 끈질긴 여정을 거듭해온 이숙자의 창작세계 전반을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4월1일까지. 02-720-102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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