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 특강 지상중계
미술사 이론보다 느낌 중시모더니즘에 민족 서정 담아
뉴욕서 끊임없는 도전 거듭
독자적 미니멀 아트로 발전
‘10만개의 점’한국미 극치
세계순회전도 도전 해볼만
한국인들은 ‘국민화가’ 하면 박수근, 이중섭을 떠올린다. 다른 작가들은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김환기(1913~74) 화백의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내년 작가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현대가 마련한 ‘한국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전(26일까지)에는 20일 현재 3만5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주말이면 삼청동 일대 교통이 마비되고 있고, 전시장에서 세 차례 열린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명지대)의 강연에는 너무나 많은 수강생이 몰려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또 김환기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국영문 혼용도록도 발간됐고, 학계에서도 연구 움직임이 활발하다. 가히 ‘김환기 붐’이다. 쉽고도 흥미로운 강연으로 앙코르를 두 차례나 받은 유 교수의 특강을 지상중계한다.
“우와, 오늘 강연엔 더 많이 오셨네요. 김환기에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 놀랍네요.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이렇게 높고 멋진 세계에 도달한 한국작가도 있네요’라며 감탄합니다. 김환기가 이런 세계에 도달한 것은 문제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이죠.
전남 신안의 부유한 가문 출신인 김환기는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했고, 고국으로 돌아와선 정지용 등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장지 삽화를 많이 그렸어요. 서울 성북동의 근원 김용준 선생의 집을 건네받아 살았는데, 인문적 정신이 있었고 시대흐름을 잘 읽었죠. 특히 우리의 도자기와 목기를 엄청나게 사랑했습니다. 그는 ‘내게 한국미를 알려준 건 조선시대 백자다. 리어카에 잔뜩 쌓인 이렇게 좋은 항아리를 사람들이 왜 안 사는지 모르겠다. 비싸지도 않은데’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근원 김용준은 미술사를 이론으로 배웠지만 김환기는 한국미술을 필링(feeling)으로 느꼈죠. 화실에 추사 현판을 걸어놓았고, 문기(文氣) 있는 목기와 도자기를 좋아했어요. 김환기가 수집한 사방탁자, 백자필통, 각병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어요. 우리 미술의 덤덤한 아름다움, 그 진수를 받아들인 셈이죠. 최순우 선생보다 먼저 백자 달항아리의 미감을 간파하고 사랑한 게 환기입니다.
그는 민족적 서정을 현대미술의 모더니즘 속에 어떻게 구현할까 치열하게 고민했던 작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소재, 사슴ㆍ학ㆍ여인ㆍ항아리ㆍ산ㆍ달을 절묘하게 그렸죠. 모두 민족적 서정이 담긴 겁니다. 그의 그림은 귀티가 나죠. 텍스처와 색감도 남다르고요.
‘국민화가’ 박수근, 이중섭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파리와 뉴욕에서 ‘한국적 추상’의 기치를 드높였던 김환기 화백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사진은 관람객이 몰리고 있는 ‘김환기전’ 현장.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
서울대 교수를 거쳐 홍익대로 옮겼던 김환기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전해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대상 작가인 고틀리프의 작품을 보곤 예술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무턱대고 뉴욕으로 날아갔죠. ‘가자, 나가서 싸우자!’라면서요. 그의 나이 쉰 살이었습니다.
이후 어머어마한 변화를 겪습니다. 1968년 초에는 ‘점인가 섬인가? 선보다 점이 더 개성적인 것 같다’며 무수한 점들을 찍어가며 형태를 만듭니다. 이만큼만 했어도 김환기는 대단했는데, 거기서 훌쩍 더 나아갔죠. 미니멀 아트에 경도돼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압도적이 됐습니다.
난 김환기가 미국의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드코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FBI까지 동원해 액션페인팅의 작가 잭슨 폴락을 키웠는데, 우리도 김환기를 세계로 키워야 합니다. 로드코와 엘스워스 켈리, 김환기를 묶어 세계순회전을 열어야 합니다. 김환기 추상은 그들과 동시대에 이룬 것이니까요. 김환기는 로드코와 맞짱 뜰 수 있는 작갑니다. 우리 정부 1년 예산이 400조, 4대강 유지 관리하는 데 4조원이 든다는데 이런 전시에 정부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김환기의 ‘10만개의 점’이란 작품을 보세요. 고국의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밤새워 찍은 점들입니다. 미국의 평론가는 장엄한 혼돈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현대의 미감으로 버무려낸 최고의 걸작입니다. 그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조명하고 제 대접을 받게 하는 것,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정리=<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