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갚아야 한다. 그런데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지면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경제주권은 지켜야 한다. 그런데 주권은 힘이다. 지킬 힘이 없는데 과연 주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최근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의 상황이다. 2300여년 전 그리스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상황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아포리아(aporia)’다. 아포리아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해 그 진실성을 확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아포리아는 ‘이율배반(antinomy)’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아포리아 상태에 빠진 곳은 그리스뿐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있다. 바로 한국거래소다. 최근 ㈜한화 상장폐지 심사와 관련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방치된 아포리아에서 비롯됐다.
먼저 김승연 회장의 주식담보 대출 연장을 위해 ㈜한화의 늑장 공시를 눈 감아줬다는 논리다.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증권 3.02%, 푸르덴셜투자증권 2.82% 등 총 5.9%의 한국거래소 지분을 갖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의 4.6%를 앞서는 단독 최대주주다. 최대주주니까 눈 감아달라고 압력을 가했을까? 한국거래소는 공공기관이다. 인사권과 예산권 등 경영관련 거의 모든 부문을 정부가 살핀다. 어떤 재벌그룹도 한국거래소에 쉽게 압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다. 물론 심사위원 개인차원에서 청탁은 있을 수 있지만,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다.
결국 첫 아포리아의 근원을 따져보면 거래소의 공공기관 지정에 있다. 만약 거래소가 공공기관에 지정되지 않았다면 상장을 했을 것이고, 증권사들은 대부분 주식을 팔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식회사지만 주식회사가 아닌 아포리아 상태가 재벌의 압력이라는 ‘암귀(暗鬼)’를 낳은 셈이다.
㈜한화의 상장폐지 심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관점은 왜 한화만 그리 신속하게 상장폐지심사를 끝냈느냐는 점이다. 중소기업인 코스닥 기업 심사를 할 때와는 너무 다르다는 논리다.
차별은 관점의 문제다. 헤비급과 밴텀급 선수를 같은 링에 올리지 않아도 차별이고, 올려도 차별이다. ㈜한화란 기업을 조금만 들여다 본다면 과연 상장폐지심사 대상이 맞는지 궁금하다. ㈜한화는 2010년 4636억원, 2011년 3분기까지 2821억원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자기자본은 5조2058억원으로 현재 시가총액의 2배에 가깝다. 재무제표가 완전 엉터리가 아닌 이상 상장폐지란 말도 꺼내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거래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아포리아를 간과했다. 헤비급과 밴텀급을 같은 링에 올리는 실수다. 공정하지만, 공정하지 못하다. 자기자본의 2.5% 이상 금액의 횡령 혐의만 인정돼도 상장폐지심사에 올릴 수 있다는 원칙에 묶여 한화를 코스닥 기업과 똑같이 취급했다. 공공기관이다 보니 너무 표면적 공정에만 무게중심을 둔 게 아닐까 싶다. 공익적 관점에서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똑같이 대접하는 게 ‘공정’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공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는 아포리아는 간과된 듯하다.
아포리아의 해소를 위해서는 두 가지 명제를 하나로 묶는 뭔가가 필요하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게 있다. 아포리즘의 사전적 의미는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짦은 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금언, 격언, 경구, 잠언 정도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은 히포크라테스의 책 ‘아포리즘’에서 비롯된 말이다.
공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은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아포리즘으로 거래소는 ‘헤비급과 밴텀급은 다르다’를 내놓을 모양이다. 회사 규모별로 상장폐지심사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한다고 한다.
그런데 주식회사지만, 주식회사가 아닌 아포리아의 아포리즘은 거래소의 능력 밖이다. 복수거래소의 실질적 틀을 만들어 줄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통과돼 공공기관에서 벗어나거나, 정부가 증권사들이 보유한 주식을 다 사들여 속까지 공공기관으로 만들거나가 해결책이다.
<홍길용 기자 @TrueMoneystory> kyhong@heraldcorp.com